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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인천하 옥매향의 정인, 을사사화의 일등공신, 우의정을 지낸 임백령 할아버지가 후손들에 의해 이장을 하느라 461년 만에 나들이를 하였다. 후손 된 도리로 할아버지에게 도포 한 벌을 새로 해 드린다는 의미로 테두리 석은 새로 하였고 나머지 석물은 그대로 사용하였다.
ⓒ 임윤수
몇 년 전 SBS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대하사극 <여인천하>에 등장하며 세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임백령의 묘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면 관산리에서 충북 괴산군 칠성면 사은리 소재 선산임씨 종중산(宗中山)으로 지난 19일 이장되었다.

1546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를 다녀오던 임백령이 병을 얻어 사망한 후 처음으로 이루어지는 이장이니 실로 461년만의 나들이라 하겠다. 오늘날 재정경제부장관에 해당하는 호조판서(戶曹判書)였던 임백령(林百齡)은 1545년 조선의 13대 임금인 명종이 즉위하면서 소윤이 대윤을 제거한 을사사화의 일등공신이다.

'여인천하'의 임백령, 461년만에 이장 나들이

임백령은 전남 해남출신으로 청운의 뜻을 품고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올라가 공부를 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에 백발을 한 선인이 나타나 '이번에 치르게 될 과거 중 강(講)은 서경 하서편 우공장에서 날 것'이라는 것을 귀띔해줬다고 한다. 노인은 문제만 일러주고 가는 게 아니라 시험지에 이름을 반드시 괴마(槐馬)라고 써야 한다는 것을 몇 번이나 강조했다고 한다.

▲ 이장을 추진한 임양수씨가 산소를 이장하게 된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다. 임양수씨는 필자의 6촌 형이다.
ⓒ 임윤수
다음날 과거를 치르는 시험장에서 임백령은 강에 앞서 시(詩)와 부(賦)를 치를 때 이미 노인의 말대로 시험지에 괴마 임백령이라고 이름을 적어냈다. 꿈속 노인은 이름을 괴마로 쓰라고 하였지만 지금껏 자신을 호칭하였던 이름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 마음에 걸려 괴마를 호로 쓰고 이름인 임백령을 쓴 것이다.

강을 치르며 시험관이 건네주는 문제를 살펴본 임백령을 깜짝 놀랐다. 주어진 문제가 바로 꿈속에서 백발노인이 알려준 그 문제였기 때문이다. 이미 문제를 알고 있었으니 한자 일획 틀림없이 강을 해 나가니 그 뛰어난 답에 시험관들이 경탄을 금치 못하였다고 한다.

시험이 끝나고 과거장을 나서는 임백령에게 시험관 중 한 명이 다가와 "혹시 자네가 괴마 아닌가?" 하고 물었다. 아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던 임백령이 깜짝 놀라며 "어찌 저를 알고 계십니까?" 하고 여쭈니, 시관이 괴마를 알게 된 연유를 들려준다. 이때의 시험관은 문장가로 이름을 떨쳐 당대의 사가(四家)로 칭송을 받았던 눌재 박상(朴祥)이었다고 한다.

박상이 시관의 명을 받고 숙직을 하던 중 꿈속에 웬 백발노인이 나타나 "'괴마'라는 뛰어난 응시생이 있을 것"이라고 너무도 생시처럼 알려줘 괴이하게 생각했었다고 한다. 강을 듣다 보니 문득 꿈에서 노인이 하였던 말이 생각나 물어보는 것이라고 하였다. 임백령은 이 과거에서 뛰어난 성적으로 당당하게 급제를 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시험을 치르고, 합격을 하면 그에 따른 축하연이 벌어지게 마련이니 합격자들을 위한 축하연에서 임백령은 기생 옥매향을 만나게 되어 연정을 쌓아가지만 인종의 외숙이었던 윤임에게 옥매향이를 빼앗김으로 윤임과는 뜻하지 않은 연적이 된다.

훗날 임백령이 대윤을 척결하는 을사사화에 주역이 되었던 이유 중 하나가 정인이었던 옥매향이를 빼앗아간 윤임, 연적에 대한 적개심 때문이라는 해석도 이 때문에 가능하다. 그러고 보니 연인을 매개로 한 질투와 사랑싸움은 예나 지금이나 지위고하를 가름하지 않는 원초인가 보다.

괴마 임백령은 필자의 13대 할아버지

잘났건 못났건, 공신이건 역적이건 할아버지(선조)와 후손이란 끊을 해야 끊을 수도, 맺고 싶다고 인위적으로 끌어다 붙일 수도 없는 혈연이며 천륜의 관계다. 필자는 선산 임씨 괴마공파다. 여기서 괴마(槐馬)란 다름 아닌 임백령, 필자의 13대조가 되는 임백령 할아버지의 호다.

과거를 치르기 전날 밤, 낯설고 물설은 한양 땅에서 불현듯 꿈에 나타난 백발노인이 임백령에게 지어준 괴마라는 호는 임백령이 급제를 할 수 있었던 현몽(現夢)일 수도 있지만 그의 일생을 예견케 하는 현문(玄文)일 수도 있었다.

▲ 이장을 한 묘는 테두리 석으로 12지신 상을 둘렀다. 전 산소에 사용되었던 테두리 석은 임백령의 4대 후손의 묘를 사초하며 사용하니 할아버지의 도포를 후손에게 물려준 의미다.
ⓒ 임윤수
괴마의 괴(槐)자는 회화나무 괴 또는 삼공 괴로 풀이된다. 삼공이란 주나라 때 우리나라로 치면 삼정승을 일컫는 의미로, 홰나무(느티나무)는 정승을 나타내는 귀하고도 신성한 나무이니 아무나 심지 못하게 할 만큼 특별한 나무였다. 그런 특별한 나무였기에 옛날에는 임금이 홰나무를 상으로 내리기도 하였으니 홰나무는 나무 중에는 으뜸으로 취급받는 신목이다.

삼공의 위를 괴위라 불렀고,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삼괴라고 일컬었으며, 대신의 가문을 괴문이라고도 하였으니 괴란 글자는 곧 정승을 의미한다.

꿈에 나타난 백발노인이 임백령에게 정승을 뜻하는 '괴' 자가 들어가는 호를 주었다는 것은 임백령이 장차 정승이 될 거라는 것을 미리 알려주었다는 해석도 가능한 부분이다. 중종조에 우수한 성적으로 과거에 급제를 한 임백령은 승승장구하면서 1540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임백령은 1498(무오)년 8월 26일생

인터넷 검색창에서 임백령을 검색하면 그가 사망한 연도(1546)는 나오는데 출생연도는 찾을 수가 없다. 브리태니커백과사전, 네이버 백과사전, 엠파스 등 어느 곳에서 검색을 해도 '?∼1546'으로 되어 있으니 임백령의 출생연도는 미상으로 되어 있다. 임백령의 형 되는 석천 임억령은 1496년에 출생하여 1568년에 사망하였다는 기록이 또렷한데 아우 되는 임백령의 출생연도가 어디에서도 검색되지 않는다는 건 기록의 아이러니다.

▲ 인터넷 검색창에서 그 출생년도가 검색되지 않는 임백령은 성종 11년인 1498년, 무오년 8월 26일 생이다.
ⓒ 임윤수
그렇다고 임백령의 출생연도가 알려지지 않은 건 아니다. 임백령의 묘비문과 선산임씨 족보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임백령은 1498년 8월 26일생이다. 1498년도는 사림파와 훈구파의 대립 끝에, 유자광 등의 훈구파가 김일손 등 사림파를 처형하고 귀향 보내는 등 인적청산을 시도하고, 이미 죽어서 무덤에 있던 김종직을 꺼내어 부관참시까지 한 것으로 알려진 무오사화가 있던 해였다.

무오년에 태어난 임백령이 명나라 사은사로 다녀오다 병을 얻어 사망을 한 1546년 역시 병오년으로, 무오년이나 병오년에 들어가 있는 오(午)자는 공교롭게도 공히 12지간 중 말(馬)을 뜻한다.

1545년 인종이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하자 우의정에 올라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를 다녀오던 임백령은 장도에 깊은 병을 얻어 더는 움직이지를 못하고 영평에서 머물게 되었다고 한다.

영평에서 치료를 받으며 머물던 어느 날, 임백령은 시중을 들던 하인에게 "올해가 무슨 해인가"하고 물으니 신하가 "예, 병오년입니다"하고 답을 하였다. 이에 깜짝 놀란 임백령이 "뭐라고? 병오년!"하고 되물었으니 이 해가 1546년 병오년이다.

임백령은 올해가 병오년이라는 말을 듣고는 장탄식을 하며 "어허∼ 내 목숨이 여기서 다하는가 보구나",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고, 태어날 때와 같은 말의 해가 되는 오(말)년이 되었으니 꿈속에서 백발노인이 지어준 괴마라는 호에 담긴 뜻을 그때야 깨달았다고 한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사용하였을 본인의 호 괴마에 담긴 뜻을 영명한 임백령도 죽을 때가 되어서야 깨닫는 안타까운 부분이다.

시생으로 과거에 응시해 우의정까지 승승장구를 한 임백령이었지만 권력의 반대급부인 암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느니 권력과 출세가 그의 영명함을 가린 미혹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임백령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암투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을사사화의 공으로 위사공신 1등 숭선부원군(崇善府院君)으로 책봉되며 우의정까지 득세하지만 시대가 바뀌니 결국은 선조 3년, 1570년에 모든 관작을 추탈 당한다.

1546년 6월 29일, 명나라를 다녀오던 길에서 병사를 한 임백령의 산소를 경기도 고양시 벽제면 관산리에 썼다 지난 19일 파묘를 하여 후손들이 집촌을 이루고 있는 충북 괴산군 칠성면 사은리 종중산으로 이장을 한 것이다.

산소를 이장하는 진짜 이유

461년 동안 무탈하게 있던 임백령의 산소를 후손들이 살고 있는 괴산으로 이장한 데는 아주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관리상의 문제다. 그동안에는 산소에 딸린 토지를 경작하며 산소를 돌봐주는, 소위 산지기할아버지가 계셨는데, 얼마 전 그분이 돌아가시며 더는 산소를 돌봐줄 여력이 없어졌다고 한다

후손들에게 있어 중시조(선산임씨 괴마공파)가 되는 할아버지의 산소를 돌볼 여건이 되지 않는다는 건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묘지 관리만을 위해 별도의 대책을 강구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니 궁여지책으로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괴산 쪽으로 이장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 산소에서 멀지 않은 고향집에는 혈연을 보여주려는 듯 철지난 열매와 만개한 산수유 꽃이 공존해 있었다.
ⓒ 임윤수
두 번째 이유는 산소에 딸린 토지에 대한 세금이다. 고양시 일대의 부동산 가격이 상승하니 산소에 딸린 토지 역시 지가가 상승하고, 이에 따라 세금이 증가하니 이를 해결하기 위한 현실적인 대책이 필요하였다. 예전처럼 도지라도 받을 수 있는 조건이라면 도지를 받아서라도 세금을 충당하면 되지만 이 또한 현실적으로 수입을 기대할 수 없으니 결국 그 토지는 부담이 되는 토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문중의 누구도 그곳에 거주하지 않으니 부재지주의 토지로 분류되어 적용되는 세율 또한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현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산소를 이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세 번째 이유는 그동안 꾸준하게 제기된 수맥과 장손집안에 발생한 사고다. 산소가 장손집안의 사고로 이어졌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수맥만큼은 이번 이장에서 확인되었다. 461년 된 산소를 파묘하니 관곽에 물이 차 있고, 관 속에 들어 있던 붉은색 명주 한 필이 물에 불어서 그대로였고, 육탈은 되었으나 윤기가 흐를 만큼 상투가 또렷하며, 손톱과 발톱 또한 또렷하였다고 한다.

<여의주를 찾아서>의 작가 김진옥씨가 던져주는 숙제

작금에는 흔치 않을 역대 정승의 이장이기에 <여의주를 찾아서>의 작가 김진옥씨와 이장 현장을 함께 찾았다. 20일 오전 11시경 찾아간 이장 현장(충북 괴산), 19일 고양시에서 모셔온 임백령의 유골은 이미 이장산소에 매장되어 봉분을 만들고 있었다.

▲ 이장한 산소를 둘러 본 <여의주를 찾아서>의 작가 김진옥씨는 필자에게 3,4년을 지켜보라는 숙제(?)를 던졌다.
ⓒ 임윤수
현장에 도착한 김진옥씨는 주변 산세를 꼼꼼히 살핀다. 그리고 이장을 총괄하고 있는 임양수(남·72)씨를 만나 유골을 매장한 좌향을 묻는다. 봉분을 동그란 형태로 쌓고 있던 산소에는 유좌(酉坐)로 유골을 모셨다고 한다. 주머니에서 패철을 꺼낸 김진옥씨는 봉분이 만들어지고 있는 산소에서 좌향을 직접 확인하더니 더는 말이 없다.

잔디에 앉아 들밥을 먹듯 점심을 먹고 자리를 옮긴다. 이왕 먼 걸음을 하였으니 고향 산세나 둘러봐 달라는 필자의 요청과 그가 저서에 쓴 것처럼 정말 산소나 집만을 보고도 내력을 말할 수 있는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곳저곳, 필자가 내력을 알고 있는 몇몇 산소와 집들을 둘러봤다. 한마디로 똑 떨어지는 그런 확답은 피하였지만 충분히 내력을 예측하거나 설명할 수 있는 그런 신통력(?)을 보인다. 어느 산소에 들리니 김진옥씨는 "이 산소의 자손들은 정신이 매우 아프거나 불안한 증세를 보일 것 같다"는 말을 한다.

실지 그 산소는 그 산소를 쓰고 얼마 되지 않아 멀쩡하게 공무원 생활을 하던 막내아들이 정신병을 앓고 있는 그런 집안의 산소였다. 둘러보는 몇몇 군데의 산소나 집을 보며 설명하는 그의 말은 필자가 고개를 끄덕이게끔 멈추지 않는다.

한참을 둘러보다 조용한 곳에 멈추어 서서 이장한 임백령의 산소를 보고 어찌 말이 없었느냐고 물으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뭔가를 설명하며 한 3, 4년쯤을 지켜보자고 한다. 3년을 지켜봐야 할 숙제가 필자에게 던져진 것이다.

을사사화의 일등공신이었던 임백령은 461년만에 유골을 드러냈으나 이미 그 백골이 진토 되고도 남을 장고한 세월이 흘렀음에도 당신이 행한 업보를 씻지 못한 듯 백골(白骨)이 성성했었다고 한다.

정승의 할아버지를 선조로 두었다는 것이 자랑일 수도 있지만, 선조의 업보가 3, 4년을 지켜봐야 할 숙제가 되었음이 인과응보와 사람 사는 길을 생각하게 하는 또 다른 현문(玄文)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 자손된 도리로 존칭을 사용해야 했겠지만 매체에 기고하는 글이기에 3자의 임장에서 성명인 임백령으로 호칭하였다.

산소의 크기는 이장일지라도 복원의 의미를 더해 원형크기에 맞췄고, 사용 렌즈(16mm)의 왜곡으로 실제보다 더 크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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