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며칠 새 확 풀린 포토맥 강, 하지만 백악관 상공에는 여전히 헬기가 선회하고 있었다.
ⓒ 박도
2004. 2. 13. 금

렌트했던 차는 일주일만 쓰고 반납했다. 동포들이 길도 낯선 늙은이가 헤매는 것을 보다 못해 자기들이 형편되는 대로 출․퇴근시켜주기로 했다. 이 일은 주로 주태상씨가 맡기로 했는데 공교롭게도 간밤에 그의 차가 고장이 나서 박유종 선생이 멀리서 오셨다.

NARA로 출근하는 길에 동승한 EBS의 김봉렬 PD가 지난번 워싱턴 취재 때는 날씨 관계로 제대로 찍지 못했다고 조심스럽게 잠시 들러서 가자고 해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교육방송국에서는 권 선생의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에서 백범 선생 암살 배후 자료 조사하는 것을 3.1절 특집으로 제작한다고 했다. 김 PD는 교육방송 직원답게 교양이 있고, 겸손하고 자신의 일에 진지한 분이었다. 우리를 위해 미국 현지까지 날아와서 고생하면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필름에 담고 있다.

봄볕이 따뜻하다. 이곳을 다시 찾은 지 며칠 사이지만 그 새 포토맥 강의 얼음이 모두 녹았다. 하지만 백악관 일대의 삼엄한 경비는 여전했다. “봄은 왔지만 봄은 아니다(春來不似春)”라는 옛 시인의 시구를 연상케 했다. 백악관에는 정녕 봄이 올는지?

▲ 이흥환 씨
ⓒ 박도
오후에는 봉사자들이 모여 그동안 한 일을 점검하면서 진지하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토론의 결과는 좀 더 폭넓게 관계 인사를 만나 자문을 구하고 가능하면 다른 기관에 있는 자료도 찾아보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퇴근길에 권헌열 이선옥씨가 그새 KISON(Korean Information Service on Net)에서 일하며 <미국 비밀문서로 본 한국현대사>라는 책을 쓴 이흥환 박사와 면담 신청을 하였던 바 오늘 저녁에 만나기로 했다면서 같이 가자고 했다.

그 날은 박유종 선생이 며칠 전부터 저녁식사를 하자고 약속한 날이지만 공적인 일이 우선이라서 박 선생님에게 그 사정을 말하여 다음 날로 미루고 권헌열씨 차를 타고 약속 장소인 평래옥으로 갔다.

▲ 김만식 씨
ⓒ 박도
권 선생과 나의 방미에 누구보다 관심과 봉사를 아끼지 않던 김만식씨가 그간의 일이 궁금해서 동참했다. 그는 당신의 생업 때문에 자료조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걸 늘 미안해했다.

초면의 이흥환 박사는 아주 신중한 분으로 말을 아꼈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진실이 드러나게 마련이라는 자신의 견해를 밝히면서 보다 전문적인 방안을 이선옥씨와 권헌열씨에게 가르쳐 주었다.

식사를 함께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나의 고교(중동) 후배인데다가 내가 모교에서 근무할 때 그는 고3이었다. 이 박사 고1 때 담임선생이 내가 가장 존경하는 홍준수 선생으로 서먹해진 분위기가 갑자기 풀렸다.

홍준수 선생님은 사회과 교사로 사회 현실을 가장 진실되게 가르쳐 준 분이었다. 고교 재학 때 홍 선생님은 신문과 교지 편집을 맡은 바, 나는 학생 기자로 어깨너머로 선생님에게 편집기술을 배웠다. 세상은 좁고 거짓말하고는 못 산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

2004. 2. 14. 토

주말인데다가 월요일이 미국 대통령의 날이라 공휴였다. 사흘 연휴다. 게다가 오늘이 밸런타인데이라서 온통 연휴 분위기로 들뜬 주말이다.

사흘을 숙소에서만 지내기도 그래서 출국 전부터, 아니 오래 전부터 초대해 준 뉴욕에 사는 졸업생 신민철 박사와 필라델피아에 사는 김영미씨에게 연락을 하자 대환영이었다.

사실 출국 전에 이대부고 동창회 관계 임원에게 미국 동창회 명부를 빌려 복사해 가지고 왔지만 그 어디에도 전화하지 않았다. 먼저 나의 방미도 개인적이 아닌데다가 모두들 바쁘게 사는데 나의 전화가 경우에 따라서 부담이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 필라델피아 거리
ⓒ 박도
그들뿐 아니라 미국에서 만나는 모든 동포들에게도 물질적인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작심했다. 바쁘고 힘들게 사는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일방으로 전화해서 부담을 주는 염치없는 사람이 될 수야.

뉴욕은 먼 길이라 애초에는 열차로 가려고 헸는데, 박유종 선생이 길 안내 겸 기사 노릇을 하겠다고 해서 여간 고맙지 않았다.

이른 아침, 김 PD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곧 도착한 박 선생님의 승용차를 타고 먼저 김영미 졸업생을 만나고자 필라델피아로 향했다. 워싱턴을 떠난 지 두 시간여 후에 필라델피아 ‘자유의 종’ 거리에서 그를 만났다.

▲ 이병은 목사님 가족
ⓒ 박도
1981년 3월 2일, 고 2-2 교실에서 만난 앳된 소녀가 이제는 아이 둘을 둔 중년 목사님 사모님이 되었다. 길 건너편에서 나를 보고 펄쩍 뛰듯이 달려왔다. 곧 남편 이병은 목사가 아이 둘을 승용차에 태우고 도착했다.

출발 전부터 자기들 집으로 가서 하룻밤 묵고 가기를 간청했지만, 딱 잘라 거절하고 두 시간만 약속했다. 피차 바쁜 사람으로 아쉬운 만남이 후일 더 추억거리이리라.

한식을 대접하겠다고 해서 그의 차를 따라 가면서 필라델피아 시가지를 주차간산(走車看山)했다. 그를 꼭 닮은 딸 예은이와 아들 예진이에게 세뱃돈 한 푼을 쥐어준 후 눈물이 글썽이는 목사 내외의 환송을 받으며, 그들이 고속도로까지 안내하는 곳에 이르러서 헤어졌다. 그 새 내 자리에는 커피와 아내의 약이라면서 그가 마련한 선물이 쇼핑백에 담겨 있었다.
미국은 역시 넓은 나라였다. 지도에서 볼 때 워싱턴과 뉴욕은 이웃 도시처럼 보여서 가까울 줄 알았는데 서울과 부산의 거리는 돼 보였다. 그 먼 길을 시속 70마일로 달리는데 언저리에는 산하나 보이지 않는 대평원이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미국은 축복받은 땅이었다. 온갖 지하지원 매장량도 숱하다고 한다. 석유의 매장량도 많지만 값싼 중동산을 사다 쓰다가 고갈되면 그제야 자기네 땅에 매장된 석유를 개발해서 쓰겠다고 할 정도로 여유 있는 나라다.

달리는 승용차의 차창으로 드넓은 대지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이런 부유한 나라가 왜 극동의 조그마한 나라를 분단시켜놓고 저희끼리 닭싸움하듯 아등바등하는 걸 스포츠를 보듯 즐기고 있을까?

▲ 저녁 밥상
ⓒ 박도
우리들 중 대부분은 그런 사실도 모른 채, 상대를 신나게 헐뜯고는 자기가 더 잘났다고 으쓱하고 있다. 그러고는 관중이 던져준 치즈를 받아먹으며 꼬리치고 있지나 않은지?

성경에 부자가 하늘나라로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지나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말은 예나지금이나 개인이나 나라나 만고불변의 진리인가 보다.

무식한 늙은이가 이런저런 망령된 생각하는 새 뉴욕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 지점에 이르렀다. 신 박사가 메일로 보내준 약도와 뉴욕으로 오는 중간 중간 계속 전화를 해서 그가 예약해 놓은 호텔을 쉽게 찾았고, 곧 신 박사도 도착해서 4년 만에 다시 만나는 기쁨을 누렸다.

4년 전 그가 모교로 찾아와서 명함을 주면서 초대했지만 나는 의례적인 인사로만 받았는데 지나가는 듯한 말이 실현될 줄이야. 그도 <오마이뉴스>를 통해 나의 방미를 알고 있었다면서 권중희, 박유종 선생 같은 귀한 손님을 모셔서 더욱 반갑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 신민철 군 가족과 김창현 군(오른쪽부터 김창현, 신민철, 필자)
ⓒ 권중희
신민철(42)군은 현재 세인트존스병원 마취과 의사로 일하고 있으며, 부인 이지수씨는 검안의사로 지역 병원에서 일하는 부부 의사다. 두 아들 동민, 동준 군과 그림 같은 집에서 아주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고국에서 온 와룡 선생을 위해 상다리가 휘어지게 진수성찬을 차렸다. 즐겁게 식사를 하면서 그 새 20여 년이 지나간 1980년대 초 암울했던 학창시절 이야기, 그때 급우였던 사형수 아들(김홍걸군) 이야기, 대통령의 직계가족들이 평범하게 살지 못하는 대한민국의 현실 등등을 이야기했다.

곧 졸업생 김창현군이 달려왔다. 그는 뉴욕에서 건축업을 한다는데, 이민 초기에는 온갖 고생을 했지만 지금은 기반을 잡았다고 했다. 이런저런 학창시절 얘기를 나누다가 숙소로 가고자 나서자 김창현군이 뉴욕 야경 안내를 자처하면서 승용차를 맨해튼으로 돌렸다.

▲ 브로드웨이의 LG, 삼성 광고판
곧 김군은 빌딩의 숲 브로드웨이에다 서울 촌 노인을 내려놓았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뉴욕 맨해튼의 거리는 온통 밸런타인데이 열기로 사람들과 차들로 가득 찼다. 10미터 되는 리무진을 타고 즐기는 청춘남녀가 있나하면 인력거를 타고 남의 시선은 전혀 의식치 않고 계속 입술을 맞추는 노부부도 뒤섞여 축제의 열기가 식을 줄 몰랐다.

뉴욕 브로드웨이 한복판 휘황찬란한 전광판 속에 ‘SAMSUNG’과 ‘LG’의 광고판을 보자 만리타국에서 고향 친구를 만난 듯 반갑기 그지없었다.

▲ 사람과 차들로 뒤엉킨 브로드웨이 밤 거리
ⓒ 박도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