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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동성로는 24시간 네온이 꺼지지 않는 젊음의 거리다. 그런 동성로에는 특별한 골목들이 몇 군데 있으니, 일명 '야시골목'이라 불리는 조그만 보세 골목도 그 중 하나다. '여우(FOX)'를 대구에선 '야시'라고 부르는데, 이는 최첨단의 패션과 트렌드를 구가하는 멋쟁이를 상징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 '야시'들이 많이 모이는 골목이라 해서 '야시골목'이란 이름이 붙은 이곳은 1990년대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작은 옷가게 골목으로 유명했다가 이제는 무국적지대로 바뀐 야시골목. 이곳에 가면 세계 여러나라에서 온 외국인들을 만날 수 있다.
▲ 야시골목 작은 옷가게 골목으로 유명했다가 이제는 무국적지대로 바뀐 야시골목. 이곳에 가면 세계 여러나라에서 온 외국인들을 만날 수 있다.
ⓒ 조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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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의 야시골목에는 여고생과 20대 초반 여성들들이 우글거렸다. 그들은 부담없이 찾을 수 있는 저렴한 가격의 보세옷과 신발, 떡볶이 같은 먹거리를 찾아서 책가방과 핸드백을 메고 이리저리 기웃거렸다. 그 시절, 대구의 가게마다 걸려 있는 옷들의 대다수가 무슨 담합이라도 한 듯 똑같은 것들이었고, 그렇게 무난하게 입는 것이 대구 사람들의 보수적 기질에도 부합하는 것이라 여기던 시절이었다.

그나마 야시골목에는 똑같은 옷들이 거의 없었다. 가게 주인들이 어디서 옷을 도매해 오는지 아주 튀고 신선한 디자인의 옷들을 팔았다. 심지어는 가게 한쪽에 재봉틀을 가져다 놓고 직접 옷을 만들어 파는 곳도 있었다. 그런 가게엔 딴 곳에 비해 옷이 몇 벌 안 걸려 있었고 인테리어도 전혀 하지 않았지만, '야시'들은 눈썰미 좋게 멋진 옷을 잘도 골랐다.

1991년 여름엔 긴 소매 윗도리를 입고 그에 비해 매우 짧은 반바지를 입는 패션이 유행했다. 지금 한창 유행 중인 '하의실종 패션'이 바로 그때 유행했던 것이다. 1990년대 초반에 일본을 먼저 강타했던 그 패션은 한국에 상륙하더니 드디어 보수적인 대구에도 스며들었다.

야시골목에서 그런 옷을 사 입고 대구 번화가를 누비는 청춘들을 보며, '저 애가 윗도리만 입고 밑에는 아무것도 안 입었다'며 어른들은 혀를 끌끌차고 눈을 어디다 둘지 몰라했다. 호기심 많은 사춘기 남학생들은 그런 여성들의 꽁무니를 쫒아가서 그 '의문'의 진상을 파악하려고 했었다.

'야시'들은 하의실종패션을 제대로 소화하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우선은 반바지를 최대한 짧은 걸로 골라 입는 것이 그 패션의 정석이다. 반면에 위에 입는 옷은 엉덩이를 살짝 덮을락 말락 할 정도의 박스형 티셔츠가 적합했다. 그리고 그 티셔츠에는 열정의 락커를 표현한 강렬한 사진, 일본어로 된 그림글자 같은 게 들어가면 금상첨화였다.

그런 멋쟁이들의 눈높이에 맞게 옷을 잘 코디해 두는 곳이 '야시골목'의 가게들이었기에, 대구의 '한 패션한다'는 청춘들은 휴일이면 야시골목으로 숨가쁘게 나다녔다. 토요일 수업후, 학교 앞 문구점에서 친구들이나 문구점 아저씨가 보건 말건 교복을 훌러덩 벗어젖히며 사복으로 갈아입던 철없는 동급생들. 그들이 입던 것도 바로 그 '하의실종패션'이었다. 공부만 못했다 뿐, 얌전하고 착하다고 알려진 그들은 그렇게 첨단 패션으로 연출하고 어른이라도 된 양 우쭐대며 자신들의 청춘의 한 시절을 걷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세월이 흘러 지금의 야시골목에는 옛날 기와집을 그대로 살린 가게들이 독특한 정취를 만들고 있다. 일본의 어느 쇼핑거리처럼 과거와 현재, 다국적문화가 존재하는 거리로서 스페인 식당, 일본돈까스점, 비키니 라인 왁싱점 같은 곳들이 들어서 있기도 하다. 최근에는 네일 관리, 페르시아 피어싱을 하러 대구의 '야시'들이 모여들고 있다. 몇년 새 상권이 변해서 기존의 옷가게들은 새로운 젊음의 거리로 옮겨가게 된 것도 변화의 원인 중 하나다.

브라질리언 비키니라인 왁싱점, 스페인 식당 등이 들어선 현재의 야시골목.
▲ 야시골목 브라질리언 비키니라인 왁싱점, 스페인 식당 등이 들어선 현재의 야시골목.
ⓒ 조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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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가게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야시골목은 이제 저렴한 가격으로 손발톱을 치장하려는 '야시' 들의 장소가 되었다. 좁은 가게 안에서 이란인 총각이 만든 페르시아풍의 액세서리를 구경하며, 전통 피어싱을 할 수 있는 곳. 하지만 그 가운데서 '임대문의'라 씌어진 종이조각이 붙은 빈 가게들이 드문드문 보이는 것도 현재 '야시골목'의 모습이다.


태그:#대구 야시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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