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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현재 가족과 함께 이집트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갈 데도 없었고 이들이 이뤄내는 역사적인 민주화과정을 지켜보고 싶었기에 피하지 않았습니다. 생생한 현장을 세상과 통하게 하고자 합니다. - 기자말

[1월 29일] '분노의 날' 닷새째, 출근했다가 집으로 피신

이집트 시위 현장에 투입된 군 30일 이집트 카이로의 반정부 시위 현장에 군인과 탱크가 투입되고 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62명이 사망했다는 정부발표와 달리 전국적으로 적어도 89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이고 2500명 이상이 부상했다고 전해진다. (EPA=연합뉴스)
이집트 시위 현장에 투입된 군30일 이집트 카이로의 반정부 시위 현장에 군인과 탱크가 투입되고 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62명이 사망했다는 정부발표와 달리 전국적으로 적어도 89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이고 2500명 이상이 부상했다고 전해진다. (EPA=연합뉴스) ⓒ 연합뉴스

이 글을 쓰기 전에 우선 가장 먼저 용감하게 일어나준 튀니지 국민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 뒤를 이어 이집트, 레바논, 예맨 그리고 알제리가 깨어났다.

이집트에서 '분노의 날(1월 25일)' 민중시위가 일어난 지 오늘(1월 29일)로 닷새째다. 이미 새벽. 더운 나라답게 이집트의 시위는 오후 4시쯤 시작 되었다가 이맘때쯤이면 최고조에 달한다. 26일, 나는 조심스럽게 출근을 했다. 우리 회사가 카이로의 다운타운에 위치한 까닭에, 무려 정오까지도 나는 출근을 망설였다.

회사임원들과 몇 차례 통화를 한 끝에 타운 내의 시위가 어느새 가라앉아서 정상을 되찾았다는 '믿을 수 없는' 대답을 듣고 출근한 나는, 그러나 출근한 지 두 시간도 되지 않아서 "Lee, 어서 달아나! 수천 명이 시내로 몰려오고 있어!"라는 외침을 들어야했다. 혼비백산 회사를 나와서 택시를 탔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결코 쉽지 않았다. 나는 택시를 두 차례나 갈아타야 했고 종내에는 집까지 30여 분을 걸어야 했다.

그리고 27일, 28일 나는 단 한 발짝도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촉이랄까. 불안감이 엄습했다. 몇몇 내가 아는 한국교민들에게 주의를 주었지만 그들은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이미 곪을대로 곪은 나라였다. 언제 터져도 터지게 되어있다면 지금이 최적기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때를 놓치면 이집트는 현 대통령(호스니 무바라크)의 아들 가말이 대권을 승계하고 5선 연임을 마치게될 30년 뒤나 기약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집트가 본격적으로 타오를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리고 '분노의 날'로부터 이틀이 더 지난 27일 금요일, 시위대는 제2의 D-day를 예고했고, 무바라크의 30년 정적이던 앨 베더레이가 자진 입국하였다.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전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은 금요일 모스크에서의 예배를 마친 뒤 가택연금되었다. 그의 입국으로 나는 이제 이 국민이 끝까지 가보려하겠구나 하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구심점 없이 군중시위가 성공해도 문제라고 우려한 바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유럽 몇몇 채널에서(우리집에서는 위성수신안테나로 그나마 세상을 볼 수가 있다) 벌써부터 '무바라크 그 다음'을 조심스럽게 점치기 시작했다. 좋은 징조였다. 의외로 이집트에는 무바라크의 정적이면서도 현명하다고 평가받는 인물들이 제법 있었다. 엘바라데이마저도 자신이 아니어도 이집트는 무사히 안정을 되찾을 것이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그것은 자신을 가둔다고 시위가 멈출 것이라 기대하지 말라는 무바라크에 대한 경고성 발언이었다. 이제 겨우 이틀 지났을 뿐인데 스스로 무바라크의 입 안으로 걸어들어온 그가 나는 마음에 들었다. 무바라크가 그대로 그를 씹어삼킬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이빨 빠진 호랑이였음을 드러낼 것인지는 신만이 아실 일이다.

28일, 29일 이집트 전역에서 모바일이 되지 않았다. 인터넷도 끊겼다. 오바마의 강력한 요구로 모바일은 29일 낮 통신이 가능해졌다. 한국의 형제들에게 모바일로 짤막한 메시지를 보냈다. 오빠들에게 전화를 드리지 못한 것이 맘에 쓰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들 라싣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웬 난리들인지 모르겠다고 푸념을 했다.

"해야지. 지금이 아니면 안 되기 때문에 하는 거야. 한국도 오래 전에 그랬단다. 대학생들이 일어났어.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요?"
"대통령이 무릎을 꿇었지. 그리고 한국은 지금처럼 잘 사는 나라가 될 수 있었다. 이집트는 한국보다 많은 것을 가진 나라야. 국민들이 이렇게 산다는 건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증거야."

라싣은 곰곰 생각하는 눈치이더니 밖으로 나갔다.

29일 현 대통령 무바라크가(어쩌면 소요가 시작되었던 25일부터 딴에는 열심히 궁리한다고 한 끝에) 내어놓은 성명은 민중시위에 기름통을 들이부은 격이 되고 말았다.

"나는 이집트를 수호할 것입니다. 나는 (오늘의 이 사태를 초래한) 내각에 총사퇴를 요구합니다. 시위대에 보복은 없을 것이며, 내일(개각 후)부터 이집트인들은 우리가 기존에 갖고 있던 것들을 공평하게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쏙 빼놓고 모든 책임을 현 정부에 고스란히 떠넘겼다. 무바라크의 대국민담화가 발표되고 오바마가 '그가 국민들에게 한 약속을 믿는다'는 지원사격을 발표하자마자, 금요일 예배 후 다시 한 번 일어났던 이집트 국민들은 이제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진듯이 행동하기 시작했다. 대통령이 퇴진할 의사가 없음을 확실하게 깨달은 국민들은 여기서 물러나면 모두가 죽는다는 절대위기를 느꼈음에 틀림이 없었다.

29일 시위는 비단 시위에 그치지 않았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시위진압에 동원되었던 군인들이 시위대에 합류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카이로에서는 지역마다 총성이 난무하고 화염이 치솟아올랐다. 군인들이 시민을 상대로 총알을 발포했다는 목격자들이 등장했고, 희생자도 늘었다. 한 의사는 28일 하루에만 60여 명의 부상자를 치료했다는 증언도 내놓았다. 어느덧 카이로 북부 델타지역의 반정부 시위는 수도인 카이로보다도 더욱 거세어졌다.

또한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에서는 남자들이 시위대에 합류한 즈음 일반주택과 상가일대를 상대로 무자비한 약탈과 차량방화가 자행되었다. 그리고 이는 지금 이 순간도 계속되고 있다. 카이로 남부의 마아디지역에서는 외국인여성들만을 상대로 성적인 폭행과 약탈이 저질러지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시위에 나가지 않은 '집에 남아 있는' 남자(혹은 청소년)들은 손에 몽둥이를 들고 수백 명씩 무리를 이루어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아파트와 주택가를 직접 순찰하기 시작했다.

평소에 골목마다 그렇게 많던 경찰들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경찰이 약탈꾼들 틈에 섞여있었다는 제보도 등장했다. 은행은 불탔고 ATM기기 내의 화폐들은 도난당했으며 알렉산드리아 최대의 쇼핑상가인 'Caffoure'는 약탈자들에 의해 거덜이 났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이집트 <Nile tv>는 카이로 인근의 감옥에서 무려 1000여 명의 죄수들이 무기를 훔쳐 달아났다고 보도했다. 교도관들이 모두 달아난 때문이었다. 우리 아파트 단지에서도 29일 저녁 약탈사건이 발생했다. 라싣도 주민경호대 300여 명에 합류하러 집에 있던 쇠몽둥이를 빼어들고 나갔다.

29일 저녁 <CNN>에 무바라크 현 이집트대통령이 경찰력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다는 보도가 나왔다. 육공군본부가 모두 주둔해있는 이곳 Heliopolis는 하나의 요새와도 같은 지역이다. 또한 카이로 국제공항을 끌어안고 있어서 이집트 정부의 최고위관리들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해외도주를 할 수도 가족들을 빼돌릴 수도 그리고 내국인들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는 지역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며칠간의 투쟁 끝에 사람들은 알아차리고 말았다. 자신들에게도 '힘'이 있다는 사실을. 위정자들이 자신들이 뭉쳐 하나의 거대한 힘을 이끌어내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Heliopolis의 젊은이들도 술렁이기 시작했다. 군대는 더 이상 그들의 가족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새벽마다 순찰을 도는 이 젊은이들의 아버지와 친척들은 모두 군간부들이거나 고위직 공무원들이다. 그럼에도 약탈자들을 막아주지 못하는 군대에 이 지역의 젊은이들은 몹시 실망했고, 새삼 비장해진 듯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느 상가가 혹은 어느 지역이 약탈자들에 의해 당했다는 소식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29일 대통령궁을 지나야할 일이 있었다. 얼마나 길어질지 아무도 모르는 이 난국에 사재기 장보기라도 해두어야할 것만 같아 나서던 길이었다. 대통령궁 주변으로 반경 1km 이내의 도로는 완전히 차단되었고 탱크들이 곳곳에 보였으며 군인들은 무장을 하고 있었다. 국내시위에 무장이라니... 도대체 누구를 향해 쏘려는 것인가 말이다.

내가 장을 보러간 씨티스타 지하의 spinners 수퍼마켓은 박리다매를 원칙으로하는 대형수퍼이다. 장보기를 해야할 때라는 위기감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얼마나 많은 인파가 모여들었는지 나는 수첩에 깨알같이 적어둔 물품들을 싣느라 함께 간 딸들을 행여 잃어버릴까 챙기느라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오후 2시면 그 자체로 초대형 백화점이기도한 씨티스타 건물을 군대가 봉쇄한다는 방송이 나왔다.

나는 무려 한 시간여를 계산대 앞의 긴 줄에 서서 보내야 했다. 그리고 저녁에는 '다음날 아침 8시까지 모든 시민은 통행을 금지한다'는 경고성 보도가 흘러나왔다. 이런 통행금지는 28일에도 있었지만 29일에는 금지시간이 더 길어졌다는 다른 점이 있었다. 나는 29일 내가 장을 볼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이 도왔다고 믿고 있다. 이미 모든 은행이 영업을 중단하였고 ATM기기들이 약탈되는 마당이 아닌가말이다. 희생자가 늘어날수록 시위대에게나 정부에게 이로울 것은 하나도 없다. 서로 격한 감정만 더해질 것이다.

목숨을 걸고 시위에 참여한 시민들에게는 너무나도 억울하게 외신에서는 온종일 '카이로는 무법천지'라는 말이 흘러나오고 있다. 이미 군에 대한 제어력도 잃은 듯이 보이는 대통령이 왜 이리 일을 힘들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항간에서는 '무바라크은 미제(메이드 인 어메리카)'라는 조롱이 돌고 있다. 나는 그가 이집트의 대통령으로서 그의 인생에 마지막으로 대통령다운 선택을 하기를 바란다. 하루 속히 퇴진하여 그의 조국과 국민들에게 안정을 되찾아주기를. 30일 무바라크의 최대 정적인 엘바라데이는 이렇게 말했다. "무바라크는 아직까지도 (민중의)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했다"라고.

[1월 30일] 아파트 단지 위로 날아다니기 시작한 군용 헬리콥터

30일은 나에게나 우리 아이들에게 매우 긴 날이었다. 겨울방학여행이 무산되고 한 발짝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된 아이들은 갑갑해서 어쩔줄을 몰라했다. 침대맡에 패킹해 놓은 여행용 트렁크 안의 옷들을 절대로 치우지 않고 온종일 들락날락하며 옷을 갈아입는 것으로 아이들은 자신들의 갑갑함을 표현했다. 불안하고 갑갑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여서 나는 어린 딸들의 손에 빗자루와 막대스폰지를 쥐어주었다.

"우리 간만에 청소하자!"

아이들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 순간만은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오로지 우리가 모두 미치기 전에 뭔가를 해야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벌써 두 번째 모바일 메시지를 보냈는데도 받았다고 연락을 해주는 이가 하나도 없는 것 또한 나를 몹시 예민하게 만든 부분이었다. 모바일 크레디트 카드를 구입할 수 있는 상점들이 모두 문을 닫았으므로 함부로 국제전화를 걸 수도 없었다. 웬만한 통화는 집전화를 이용했고 모바일 발란스는 비상용으로 남겨두어야했다. 인터넷은 여전히 닫혀있었고 스마트폰을 눌러보아도 여전히 먹통이었다.

나는 시험삼아 스마트폰의 '메시지 보내기'를 통해 아이들 사진 한 장을 찍어서 한국으로 보냈다. 하지만 받았다는 회신이 없어서 그도 제대로 전달이 되었는지 미심쩍었다. 게다가 아파트단지 위로 전날과 다르게 군용 헬리콥터들이 대거 이동하기 시작하였으므로 우리 아이들은 창문 근처로는 가려고하지도 않았다. 지구상에 우리만 달랑 남은 것같은 공포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낮에는 아이들에게 청소를 시켰듯이 저녁에 나는 각자 영어단어 20개씩을 외우라며 아이들을 책상 앞에 강제로 앉혔다.

'평소와 다름없이.' 내 머릿속은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과일을 깎고 주스를 만들어 아이들 책상 앞에 놓아주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아이들이 두려움이나 충격따위를 받을 틈도 생각할 틈도 주지 않으려고 말이다.

나는 온종일 나에게 연락을 하는 이가 없음에 서운해했던 생각을 고쳐먹기로 하였다. 내가 아는 교민들 중에는 자의든 타의든 혼자 생활하는 사람이 많았다. 다들 나처럼 '위기에 닥쳐 아무도 안부를 물어주지 않아 서운해'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않은가. 나는 교민명부에 등록되지 않는 지인들이 제법 되는 관계로 이들을 상대로 대사관 대신 연락을 취해보기로 했다.

그들은 거주민 등록을 하지 않아 어쩌면 우리 대사관이 미처 그 존재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또 어떤 이들은 교민명부에 오래 전 전화번호가 올라있기도 하였다. 오후까지 나와 연락이 닿은 이들은 모두 열 사람이었다. 그들 중에는 혼자서 지내는 이도 있었고 가족과 함께 체류하는 이도 있었다. 신기한 것은 '비상 전세기가 뜬다'는 나의 정보에도 이들의 반응은 하나같이 시큰둥했다는 사실이었다.

"안 갈 거예요? 화요일, 목요일 두 차례 대한항공이 온다는데."
"그냥 있어보려고요. 심각한 것 같지도 않고."
"그럼 언제 모바일이 다시 끊길지도 모르니 우리 서로 집전화번호를 알아두면 좋겠어요."
"Lee씨 말대로 합시다. 번호 불러주세요."

그들은 나의 제의에 흔쾌히 동의해주었다. 나는 '꼭 남을 것같은 사람' 교민 몇이 연락이 닿지 않아 발을 동동 굴렀다. 머지 않아 모바일이 다시 끊길지도 모른다는 예감 때문에 나의 예전 전화번호수첩을 뒤지는 손길이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심지어 지난해 대사관 주최 교민모임에서 만났던 나이 든 선교사분까지 떠올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분의 소재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내가 아니더라도 대사관에서 연락이 닿았으면하는 간절한 바람으로 나는 그분과 접촉하려던 시도를 접어야 했다. 홀로 외딴 지역에 거주하는 몇몇 지인들과는 천만다행으로 연락이 되었고 몇은 한국행 전세기를 타겠다는 결심을 밝혀주었다.

"고마워요 연락해주어서."
"아니에요. 조심하세요."

그들도 나처럼 '두려움 속에서 극한의 소외감'을 느끼는 중이었을 수도 있다. 그들은 연락을 해준 나에게 감사했지만 나는 내 연락을 받아준 그들이 고마웠다. 무엇보다 안전하다는 확인이 몹시 고마웠고 비상연락망이 서서히 갖추어져가는 것같아 기뻤다. 두려움은 혼자일때 훨씬 커진다. 함께 갈때 멀리 간다는 말은 바로 이런 때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우리는 대화하며 웃었고 두려움을 잊었으며 희망을 주고 받았다. 아이러니한 얘기지만 평소 마주치면 눈인사나 하든지 바쁘면 그냥 지나치기도 했던 우리는 마치 아주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처럼 서로를 반가워했고 모처럼 행복했다.

[1월 31일] 치안부재... 어린 소년들까지 방범대에 참여

 지난 9일 이집트 카이로에서는 반 무바라크 시위 중에 사망한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 촛불 시위가 열렸다.
지난 9일 이집트 카이로에서는 반 무바라크 시위 중에 사망한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 촛불 시위가 열렸다. ⓒ EPA=연합뉴스

31일, 카이로 북쪽의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실종된 경찰 대신 시민들이 자신들의 거주지역으로 통하는 길목들을 차단하고 통행자들을 검문하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창 밖을 살피다가 정오쯤 기어이 알렉산드리아의 가족들 곁으로 가야겠다고 우리집을 나섰던 지인은 평소의 배에 가까운 시간을 들여 가까스로 알렉산드리아에 닿았노라 연락해주었다.

<CNN>을 통해 나오는 카이로 다운타운도 오전 9시에서 정오무렵까지는 평상시와 다름 없어보였다. 누구는 타운 근처의 아타바시장에서 장을 보아왔고 또 누구네 회사는 정상영업을 했다는 말도 들렸다. 하지만 영업이라는 것이 주고 받는 것이니 그 회사만 문을 열었다고해서 '정상적으로' 영업이 되었을 것같지는 않았다. 이미 카이로 시내의 은행들은 문을 닫았고 대학은 중간고사를 무기한 연기하였으며 초·중·고등학교는 2학기 개학을 코 앞에 두고 있지만 그 일자는 불투명하게 되었다.

카이로 시민들은 이제 아예 텐트를 챙겨들고 타흐리르광장으로 나아갔다. 개중에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참가하는 이도 있었다. 나는 '이 국민들이 이제 정말 단단히 각오를 했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치안부재라고는 하지만 자신들의 거주지는 어린 소년들까지 나서서 지키기 시작을 했다. 어제처럼 오늘도 주민방범대에 참여하기 위하여 라싣은 철봉바를 손에 들었다. 비장한 표정으로 집을 나서던 라싣을 나는 꼬옥 안아주며 말했다.

"잘 하고 있는 거야."

라싣은 내 말의 의미를 이해한 것 같았다.

"네..."

고개를 끄덕이며 라싣은 집을 나섰다. 오후부터 <CNN>을 틀었다. 시위가 끝난 현장의 쓰레기를 줍고 비질을 하는 자원봉사자들이 등장했다. 탱크가 늘어서있고 군용기가 저공비행을 하고 밤으로는 총성이 끊이지 않으며 수천 명 때로는 수만 명이 모여 목숨을 걸고 투쟁을 하는 이 와중에 말이다. 광장을 청소하는 카이로 시민들의 모습이 <CNN> 화면을 가득 채웠을때 나는 그만 왈칵 눈물을 쏟고야 말았다.

'아, 하느님.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들입니까. 얼마나 멋진 사람들입니까. 이번에는 당신께서 반드시 이들 편에 서주셔야겠습니다! 꼭이요, 꼭!'

전세계에서 이집트 국민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응원시위가 이어졌다. 31일 <CNN>은 '오바마 정부의 딜레마'라는 조심스런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이번에는 미국이 연간 13억 달러의 원조를 이집트에 해주고 있다는 따위의 기사가 아니었다. 자유를 외치는 이집트국민들을 핍박하는 무바라크 정부에 '세계 자유 민주주의의 수호자라고 지난 200여 년간 스스로 자부해온 미 합중국'의 대통령은 언제까지 독재자를 옹호할 것인가 예의주시하겠다는 일종의 경고였다.

<알 자지라>에 카메라를 압수당했고 강제 철수당했다는 기사가 떴다. <CNN>도 여러 차례 카메라를 빼앗기기는 했지만 용케도 무사히 이집트 현장을 취재하고 있다. <BBC>는 아예 아랍어중계채널을 마련해두어서 영어채널이 닫힐 경우에도 우리는 생생하게 이집트 각지의 시위현장들을 볼 수 있었다.

31일 늦은 저녁, 이스라엘의 네탄야후 대통령이 이집트의 치안과 자국과의 평화협정에 대한 우려에 대하여 공식적인 언급을 했다. 분노의 날로부터 7일째, 외신은 수에즈운하를 항해하는 선박들은 과연 안전할 것인가에 대한 화두로 하루를 시작했다. 이집트의 위기로 국제유가가 치솟기 시작했고, 세계는 '어쩌면 이번에는 이집트 국민들이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하는 시선으로 이집트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엘바라데이 외에도 무슬림 형제단(이집트 야당 중 하나)도 '무바라크 퇴진 후'를 겨냥하여 유세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엘바라데이는 야당연합정부를 제의했다. 누가 되었든간에 우선은 독재를 청산하는 것이 급선무인지라 시민들은 누구를 그들의 대표로 세울 것인가하는 문제에 아직까지는 크게 휘둘리지 않고 있는 분위기이다.

[2월 1일] 오후 1시 23분, 밖에서 총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2월 1일이 되었다. 집에는 이제 딱 한 끼분의 빵만이 남아 있었다. 빵 이외에 장기저장이 가능한 식품들은 며칠 전 사재기를 해둔 터였지만 빵 없이 매일의 아침식사를 해결해야할 문제가 예상보다 빨리 생기자 나는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하루 세 끼를 밥으로 해결한다면 저장해둔 음식물들은 훨씬 빠르게 소비되고말 터였다. 게다가 아무리 내가 먹지 않는다고해도 비축해둔 쌀만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천만다행으로 나는 채식주의자에다 밥도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아이들의 끼니만 제대로 챙겨주면 될 것도 같았다.

나는 식품저장고에 쟁여두었던 밀가루팩들을 곰곰 들여다보다가 마침내 한국식 칼국수를 만들기로 결정을 내렸다. 우리 할아버지와 어머니 형제들은 이보다 더한 상황에서도 살아남으셨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그분들은 전쟁을 몸소 치렀고 피난을 하면서 살아야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나는 그래도 아이들과 집 안에 있으니 복이라면 복이 아닐까 싶었다. 그러니 징징대지 말자고 기운을 내자고 그저 기도하는 마음으로 버텨내자고 나 자신을 독려했다.

영국에서 입국하지도 못하고 발이 묶인 남편은 모바일도 이메일도 되지 않자 몹시 놀란 모양이었다. 두바이에 있는 지인을 통하여 어찌어찌 나에게 연락을 해왔다. 우리는 아직 무사하다는 전갈과 이집트에 절대로 입국하지 말라는 주의를 전해주었다. 밖에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우리를 맞을 준비를 해두는 것이 우리에게 의지가 될 것이라는 말과 함께. 내가 이 나라를 떠날 생각이 아직까지는 추호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나는 나에게 아이들이 있는 이상 언제나 제3의 길을 준비해야 하는 것도 부모의 도리라고 믿고 있다.

군중시위는 이제 대국민참여시위형태로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백여 만 명의 '시위참가희망자'들이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를 향해 이동하고 있다는 소식이 외신을 가득 채웠다. 이집트 정부가 조만간 모바일 커넥션도 끊을 것이라는 소식도 잇달았다. 헬리오폴리스지역에 있는 대통령궁으로 오늘 시위대 만여 명이 쳐들어갈 것이라는 소식은 이미 지난 밤 카이로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대통령궁 부근에 살고 있는 나는 당연히 올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위대가 카이로 시내에서 대통령궁으로 가려면 반드시 지나야하는 길목에 우리 아파트단지가 있기 때문이다. 집집마다 초긴장상태로 오늘 하루를 시작했다. 아직 오후 1시 23분 밖에 되지 않았는데에도 창밖에서는 벌써부터 섣부른 총성이 들려오고 있다. 오늘 통금은 오후 3시부터라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2월 2일] 무바라크, 왜 꼭 밤에 성명을 발표하는지...

2월 1일이 무사히 지나갔다. 웬일로 내가 사는 지역(대통령궁 인근)이 조용한가 했더니 저녁에는 외국인 밀집지역인 maadi에 사는 아는 동생녀석이 혼비백산해서 전화를 걸어왔다. maadi에서 온종일 총성이 났는데 무서워서 죽을 뻔했다고.

"누님, 밖에 혹시 무슨 소식 없어요?"

그의 아파트에는 텔레비전도 없고 가정용 전화기도 없었다. 인터넷도 끊긴 마당이라 밖과의 소통이 완전히 두절된 그가 두려움을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집에 먹을 것도 바닥이 났고 가스도 다 떨어져가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했다.

나 역시 너무 멀리 떨어져있어서 그를 도울 수가 없었다. 나는 그를 도울 만한 주변의 한국인들을 궁리했다. 그랬더니 그는 펄쩍 뛰었다. 아직 그 정도(긴급구호를 받을 정도)로 자신의 처지가 급박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보니 앞으로 얼마나 더 길게 갈지 모르는 시국인데 벌써부터 법석을 떨 필요는 없을 것도 같았다. 게다가 maadi에는 슈퍼도 많고 한국인들도 아직 많으니까.

1일 밤 무바라크 대통령은 오는 9월에 있을 대통령 선거에 불출마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지난 1월 25일 <분노의 날>이 시작된 이래 두 번째 공식성명이었다. 헌데 듣고 있자니 참 딱한 대통령이란 생각이 들었다. 82세의 고령에 그럼 한 번 더 출마하려고 했었다는 것인가? 사람들은 도통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척'하는 대통령에 질려버린 눈치였다.꼭 성명을 발표해도 밤에 하곤 하니 시위자들은 또 한 번 울분을 삭이며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야 말았다.

2일, 친구와 친구의 여섯 살배기 딸아이는 한국행 항공기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무바라크 대통령은 자신의 손에 다시 한 번 민중의 피를 묻히는 중대한 과오를 범했다. 오바마 미 대통령이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은 국민의 뜻에 부응하여 이집트에 새로운 질서가 시작되도록 해야 하며, 그 시작은 '바로 지금'"이라는 다소 강경한 성명을 발표한 바로 그날이었다.

<CNN>을 비롯한 외신들은 일제히 미국의 태도변화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나는 직감적으로 오바마가 무바라크를 완전히 버렸다는 사실을 재삼 깨달았다. 시위대에 힘과 정당한 명분이 실릴 수 있는 좋은 징조였다.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이날 대통령을 지지하는(혹은 대통령측이 돈을 주고 고용한 용병 호위대들) 이들이 대통령 퇴진을 강력히 요구하던 시민들을 공격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날 밤의 부상자는 400에서 600으로 다시 900 그리고 다음날 오전에는 5000명으로 그 숫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단 하루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2월 3일] 카이로 시내 호텔에 난입한 정체불명의 정부요원들

2월 3일 전세계가 무바라크와 이집트정부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사태가 오히려 악화되자 정부는 부통령을 내세워 지난 밤에 벌어진 일에 대하여 사과를 했다. 30여 년만에 부통령이라는 직위가 부활되고 그 자리에 임명된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서 오마르 술레이만 이집트 부통령이 한 '공식적인' 일은 바로 그것이었다.

자신이 하지 않은 일에 대하여 누구 대신 사과를 하고 누구 대신 언론의 매를 맞는 것. 어쩌면 무바라크는 진작에 부통령을 임명하여 쏠쏠하게 써먹지 못했던 지난 날을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민들에 대한 무바라크 호위대의 무력공격은 중단되었다. 하지만 카이로 시내의 타흐리르광장 부근 호텔에 대한 정체불명의 정부요원들의 난입시도와 외신기자들에 대한 폭행이 새로이 시작되었다.

<CNN> 기자가 폭행을 당했고, 알 아라비야 카이로지국은 보호를 요청할만큼 다급해했으며, 알 자지라 기자들은 체포되었다. 무바라크 대통령에게 불리한 기사를 쓴다는 이유로 외신기자들은 물론이고 외국인의 얼굴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가 무차별 테러대상이 되었다. 누구의 말처럼 이집트의 앞날은 하루하루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튀고 있었다.

나는 오전에 잠깐 문을 연 동네 수퍼마켓에서 양에 비해 너무 가격이 높은 '리치 베이크'(햄버거용 빵)를 보이는 대로 사와서 냉동고에 넣어버렸다. 몇 날 며칠 팔리지 않은 채 있던 것이라 신선도를 기대하기는 어려웠지만 빵공장 앞에 길게 늘어선 현지인들 틈에 끼어 몸싸움을 할 용기가 나지 않은 탓이었다. 가뜩이나 민감한 시국에 외국인의 얼굴로 빵을 갖고 다툴 수는 없었다.

인터넷이 개통되고 '외국인들의 사재기로 현지인들의 식량이 부족하다'는 국내 모일간지의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는데 너무도 현장감이 없는 기사라 헛웃음이 났었다. 외국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마켓은 서민들은 이용하기 어려운 곳들이고 그곳에서 외국인들이나 현지 중산층들이 아무리 물건을 사지 않아도 서민들의 시장으로 물품(혹은 식품이든간에)이 유통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기사를 어떻게 '귀로 받아 듣고' 쓰고 있는지 원.

[2월 3일] 정부가 보낸 전세기, 1천 달러씩 내야 한다고?

3일 목요일, 나는 우리 회사 부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째서 회사에 전화를 할 생각을 여태 하지 못했었는지 나 자신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여태 한국인들만 걱정을 했었다. 부사장은 내 목소리를 듣자 몹시 놀라워했다. 내가 한국 비행기로로 출국한 줄 알았던 모양이다. 부사장을 통해 내 얘기를 들은 회사 간부도 전화를 걸어 왔다. 나는 나와 아이들이 무사하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리고 아울러 나를 염려해준 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했다.

나의 오랜 미국인 친구는 자녀들과 함께 일요일 출국을 결정했다고 연락해왔다. 아이들이 너무나 두려워하고 있어서 내린 결정이라고 했다. 미국대사관도 자국민의 비상출국을 위해 동원한 항공기의 티켓요금을 지불하라고 요구해서 그 친구도 항공료를 지불했다고 했다. 우리 교민들 중에서도 자신들을 '탈출'시키려 정부가 보낸 전세기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일인당 무려 1000여 달러씩을 부담해야 한다는 말에, 오는 일요일(6일) 마지막으로 올 대한항공을 포기하고 다른 항공사를 이용하겠다는 이들이 더 많았다.

나는 식구수가 많아서 항공료도 부담이 될뿐만 아니라 한국에 머물 집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훌쩍 떠난다고 만사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문제의 시작이라는 생각에 일찌감치 출국하려는 마음을 접은 상태였다. 아마도 남아 있는 대다수의 교민들은 나와 같은 입장이 아닐까 한다.

무바라크 대통령은 오는 9월 대통령선거에서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차남인 가말도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는 성명을 부통령을 통해 발표했다. 또 별도로 자신은 나이가 들고 병이 든 몸이라 '당장' 대통령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당장 자신이 물러나면 이집트가 큰 혼란에 빠질 것이기 때문에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두지 못한다'는 어려움(?)을 토로했다. 사람들은 대통령 얼굴은 철판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큰 길쪽에서 구급차 경적이 온종일 들렸다.

[2월 4일] 미국이 뭔데, 이집트 과도정부를 논하는가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이 즉각적인 하야 요구를 거부한 가운데 11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남동 주한 이집트대사관 근처에서 이집트인들이 무바라크 대통령의 사퇴를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이 즉각적인 하야 요구를 거부한 가운데 11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남동 주한 이집트대사관 근처에서 이집트인들이 무바라크 대통령의 사퇴를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연합뉴스

2월 4일 금요일, 시민들이 'Day of Departure'(대통령퇴진의 날)로 지목한 바로 그날이 되었다. 온종일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 만수라, 아슈트,수에즈 그리고 아스완 등 대도시의 시민들은 긴장 속에서 하루를 보내야 했다. 카이로 시내의 심장인 타흐리르광장 내 군중이 Heliopolis에 있는 대통령궁을 향해 진군하는 날로 다시 정한 바로 그날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CNN>을 온종일 지켜보며, 이집트 각지의 한국인 지인들과 통신을 하며 가슴을 졸인 날이었지만 우리가 예측했던 유혈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CNN>은 광장에서 대통령궁으로 가는 예상루트까지 친절하게 방송으로 짚어주었지만, 카이로 시민들은 이날 진군하지 않았다. 그들은 '충돌과 혼란'을 막기 위해 노력해달라는 이집트군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무바라크 대통령 스스로 물러나기를 만 하루동안 기다려주었다.

그런 와중에 미 상원에서는 무바라크 이후 이집트에 과도정부가 들어서야할 필요가 있다는 안건이 만장일치로 통과가 되었고, 나는 그 기사를 읽으면서 혼자 입에 거품을 물고 펄펄 뛰었다. 나 역시 무바라크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건 정말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말하자면 우리나라에 정치적 분란이 생겼다고해서 일본정부가 지들끼리 안건을 내고 우리나라에 과도정부를 세우는 일에 찬성한다는 결과를 내었다는 외신을 들은 기분이랄까. 너무 오버스럽지 않은가 말이다. 물론 미국정부는 '모든 것은 이집트국민들에 의해서'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말이다.

2월 4일 오후쯤 유럽에서 이상한 반응이 도출되었다. 벨기에와 독일이 제일 먼저 '9월에 평화적으로 정권이양을 약속했으니 기다리는 것이 어떠한가'라는 다소 이집트정부와 무바라크의 편에 선듯한 의사를 표명했다. 이란은 이집트의 현재 분위기를 30여 년 전 호메이니가 팔레비국왕을 쫓아내고 입성했을 때와 비견해 대대적으로 환영을 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집트에서는 2월 4일 하루동안 차기 대선출마 의사를 발표한 인물들이 세 명이나 등장했다. 또한 미국은 이왕 시작한 거 아주 대놓고 무바라크 정수리를 콕콕 쪼아대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는 말은 이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미국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나는 유럽과 이스라엘이 아프리카와 중동의 안정화와 수에즈운하의 안위, 그리고 자신들과 비즈니스를 할 계획이 전혀 없어 보이는 무슬림형제단이 이집트의 정부로 들어서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미국도 좀더 분발하여 무바라크를 퇴진시키려하겠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무바라크는 자신의 퇴진 후 신변안전보장을 해주겠다는 나라가 선뜻 나서지 않기 때문에 자진출국과 임기내 퇴진을 거부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무바라크가 시민과 외국인에 대한 테러의 도를 높일수록 자신에게 더한 위기가 오리라는 사실도 직시해야 할 것 같다. 미국이 할 수 있는 일이(늘 그들이 그래왔듯이) '대화'만은 아니지 않은가.

덧붙이는 글 | 서주 기자는 현재 이집트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 교민입니다.



#이집트민중항쟁#이집트민주화운동#카이로#무바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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