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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사과하라!' 숨진 친구의 관을 든 고교생들 아침 조회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고교 2년생이 전교 학생회장으로부터 구타를 당해 숨지는 사고가 발생한 강원 강릉시 모 고교생들이 21일 강릉시내에서 숨진 학생의 영정과 관을 들고 "학교 측은 사과하라" "숨진 학생을 살려내라" 는 등 학교폭력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 학교에서는 20일 오전 홍모(18.2학년) 군이 학생회장인 박모(19.3학년) 군에게 복부 등을 수차례 맞은 뒤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졌다.
▲ '학교는 사과하라!' 숨진 친구의 관을 든 고교생들 아침 조회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고교 2년생이 전교 학생회장으로부터 구타를 당해 숨지는 사고가 발생한 강원 강릉시 모 고교생들이 21일 강릉시내에서 숨진 학생의 영정과 관을 들고 "학교 측은 사과하라" "숨진 학생을 살려내라" 는 등 학교폭력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 학교에서는 20일 오전 홍모(18.2학년) 군이 학생회장인 박모(19.3학년) 군에게 복부 등을 수차례 맞은 뒤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졌다.
ⓒ 연합뉴스 유형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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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매란 게 정말 있을까?'

가끔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아이들과 생활한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사랑의 매'란 없다는 것이다. 사랑과 매는 어울릴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물과 기름 같은 사이이다. 그런데 우리는 물과 기름과 같은 사랑과 매가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착각한다.

사전을 찾아보면 사랑은 이성의 상대에게 끌려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 또는 그 마음의 상태나 부모나 스승, 또는 신(神)이나 윗사람이 자식이나 제자, 또는 인간이나 아랫사람을 아끼는 마음 정도로 표현되어 있다. 교육현장에서 사랑이란 두 번째에 해당된다 하겠다.

그럼 매는? 매는 사람이나 짐승을 때리는 막대기, 회초리, 곤장,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또는 그것으로 때리는 일이라고 적혀 있다.

이렇듯 단어의 의미를 보면 사랑과 매는 조화를 이루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우리는 집에서나 학교에서 그 '사랑의 매'란 것을 사용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내가 너를 사랑하고 아끼기 때문에 때리는 거야.' 그러나 경험상 사랑하고 아끼기 때문에 매를 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물론 아이의 잘못된 점을 고쳐주고 바른 생각을 갖게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매를 대는 경우는 있다. 이로 인해 개선의 효과를 보기도 하고 말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사랑의 매라고 할 순 없다.

옛날에 어떤 연예인이 이런 말을 하여 사람들에게 회자된 적이 있다.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고. 가끔 역설적 표현을 이야기할 때 인용하기도 하지만 이 말은 '사랑하기 때문에 매를 대는 거야'와 별반 다르지 않기도 하다. 그래서 '사랑한다면 더욱 아끼고 위해줘야지 왜 혼을 내요?' 하는 아이들의 반문이 결코 이상하지만은 않다.

그런데 웬 뜬금없는 매 타령이냐고? 요즘 심심찮게 체벌과 관련된 글들을 접했기 때문이다. 강릉의 모 고등학교에선 조회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선배가 후배를 폭행 치사했다는 기사도 접했다. 벌어져서는 안 될 일이 벌어진 것이다. 왜 선배는 별 것도 아닌 아침 조회 불참석이라는 이유 하나로 후배를 폭행했을까. 아니 그것보다도 폭행이라는 물리적 수단을 사용해야 했을까.

그건 하나의 관습적 문화 때문은 아닐까 싶다. 우리 의식과 몸은 어느 틈엔지 서열의식이 배어 있다. 그 서열의식이 군사문화의 잔재라고 말하기도하지만 일제시대 때부터 우리는 그 서열화 의식을 주입받아왔다. 그것이 군사문화로 이어지고 학교에까지 퍼진 것이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일제고사도 서열화의 또 다른 하나이다. 학교 평가는 물론 교원평가도 서열화의 하나이다. 줄을 세워 정열화해야 뭔가 된 것 같은 사고와 의식이 자꾸 평가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꾸 평가라는 잣대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간과하는 게 있다. 이것이 인간의 사고의 다양성을 파괴하고 인간의 상대성을 무시하는 교육으로 직결된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주입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타인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데는 인색하다. 그렇기에 자신의 생각과 어긋나는 행동이나 발언을 하면 물리적 힘을 가하게 된다.

학교현장에선 그것이 체벌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어떤 학교에선 체벌 동의서를 만들어 체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했다고도 하는데 사실 체벌에 정당성이란 없다. 그저 아이들을 잘 다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라고 보면 된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사람 또한 체벌이라는 형태를 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로 후회를 하곤 한다. 체벌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는데 왜 내가 그랬지 하면서 말이다.

요즘 학교 현장에서 교육하고 있는 교사들의 입에서 자주 나오는 말 중의 하나가 '요즘 아이들 정말 못 해먹겠어.' 이다. 체벌이 거의 사라진 학교에서 아이들은 그야말로 제멋대로인 경우가 허다하다. 어떤 아이들은 '때리려면 때려봐?' 하는 표정으로 도발을 하기도 한다. 시쳇말로 꼭지가 돌게 하는 아이들도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그런 아이들에게 매를 들기도 쉽지 않다. 들어서도 안 된다. 매라는 것을 든다고 해서 아이들의 도발성이나 행동이 개선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 매를 대면 아이들이 말을 잘 들을 거라는 것이다. 솔직히 처음엔 듣는다. 아니 듣는 척한다. 그러나 매를 맞는 것도 때리는 것도 습관이라고 나중엔 일상적인 그저 그런 행위가 되고 만다. 서로간의 감정만 상하게 하는 행동이 되고 마는 것이다.

체벌의 사전적 의미는 몸에 직접 고통을 주어 벌하는 것을 말한다. 아이들과 부대끼며 생활하다보면 체벌의 유혹을 느끼기도 한다. 불가피한 경우 가벼운 체벌의 형태를 취하기도 한다. 다만 그럴 경우 충분한 이유를 설명하거나 이해시킨 경우다. 그렇지 않으면 감정의 골로 남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좋은 것은 체벌의 형태를 취하지 않고도 아이들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매를 들지 않고 아이들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헌데 그게 쉽지 않다. 마음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마음으로 다가가지 않고 이해하지 않으면 아이들은 변화를 보여주지 않는다. 어쩌다 작은 변화를 보여주었을 때 칭찬의 타이밍을 놓치고 바르지 못한 행동을 지적하면 뒤로 가고 만다.

그래도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사랑의 매가 아니라 사랑의 말이 아닐까 싶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매를 대면 아픔이라는 흔적이 남지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말(칭찬)을 하면 작지만 새로운 울림이 남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어려울지라도 말이다.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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