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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행? 아니면 철수?
 
집사람의 얼굴을 쳐다보니, 집사람은 “여보 우리가 산에 다니면서 도중에 포기한 적 있어? 올라가자!” 나의 용기를 북돋운다.

 

어제 저녁에도 계룡산 야간 등반을 했던 집사람은 내심 자신에 찬 목소리다. 만덕사 뒤에 우뚝 선 백화산은 화강암 절벽의 매우 장대한 위용으로 나를 압도한다. 정상에 올라서기 전에 날이 저물 텐데……. 속으로 중얼거리며 집사람과 나의 헤드랜턴을 점검해본다. 헤드랜턴의 밝은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환각에 빠져든다.

 

집사람은 “대장! 농부들이 알려준 대로 보살들이 사는 집 뒤로 길이 있네”하면서 배낭을 메고 우측 길로 접어든다. 어? 농부들이 얘기한 보살들의 집 뒷길은 좌측길인데, 이미 집사람은 미루와 같이 저만치 앞서 간다.

 

나도 부랴부랴 배낭을 울러 메고 집사람 뒤를 따른다. 아니나 다를까 20m도 못가 등산로는 대웅전 뒷길로 연결된다. 농부들이 고생께나 하게 된다는 대웅전 뒷길로 말이다. 하루 종일 실수를 연발한 나는 이제 집사람을 되돌릴 용기가 나질 않는다. 에라! 이제 엎어진 물이다.

 

정상을 향하여!

 

산길은 30˚ 이상 되는 경사길이다. 두 발짝 나아가면 한 발짝 미끄러지면서 전진을 계속한다. 다행히 눈길에는 앞서간 등산객 발자국이 있어 한 가닥 위안이 된다. 속도 모르는 미루는 우리들이 올라가면서 굴리는 돌을 쫒아 종횡무진 날뛴다. 이놈아! 앞으로 산행을 해야 할 길이 얼마나 될지 나도 모른다. 힘을 아껴라 힘을 아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맡기고 마냥 즐거운 미루가 부럽다.

 

온몸에 땀이 베어나고 숨이 차나 오래 쉴 수도 없다. 이미 한 시간 이상 산행을 했으나 우측에 보이는 백두대간의 능선은 아스라이 먼 곳에서 우리를 비웃고 있다. 앞서 간 등산객의 발자국도 자주 끊긴다. 미루의 재롱만이 유일한 낙이다.

 

5시 정도나 됐을까? 만덕사를 떠난 지 두 시간 가까이 되자 공재선이 눈앞에 나타난다. 날이 급속히 어두워진다. 정상은 멀지 않은 것 같으나 이제까지 안내 역할을 해온 발자국이 없어지고 암벽 등반을 해야만 올라갈 수 있는 거대한 암벽이 앞을 가로 막는다.

 

집사람이 힘들어한다. 날이 완전히 어둡기 전에 백두대간 능선에 올라서야 된다는 생각에 두 손을 불끈 뒤고 이를 악문다. 바로 올라가는 길이 없으니 우측으로 트라바스 해야 할 것 같은데 코스가 쉽지 않다. 지친 집사람을 앉혀놓고 10~20m 씩 길을 찾아 집사람을 부른다. 여보! 여기야! 집사람에게 자신감을 주기위해선 목소리가 우렁차고 자신감에 차 있어야 한다.

 

스틱을 접어 넣고, 두 손과 발로 오르내리는 험한 바위코스를 가로지른다. 미루도 용을 쓰며 따라온다. 절박한 상황을 감지한 것 같다. 자주 길을 잘 못 들어 되돌아간다. 미루는 무조건 내 뒤를 따른다.100일 된 강아지가 대견스럽다. 조그만 참아라! 곧 좋은 등산로를 찾는다.

 

5시 30분이다. 악몽 같은 30여 분 미로 찾기 끝에 옥녀봉에서 백두대간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올랐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간 발자국이 선명한 백두대간의 마루금이다.

 

여보! 길을 찾았다!

 

뒤따라 온 집사람의 이마엔 땀이 많이 흐른다. 미소도 따라 흐른다. 미루도 좋은지 꼬리 놀림이 힘차다. 능선상의 칼날 같은 바람이 깊숙이 파고든다.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고어텍스 방풍복으로 중무장한다. 백화산 정상을 확인할 때까지는 마음을 놓을 수 없다. 간단한 간식을 셋이서 공평히 나눠먹고 백두대간 능선을 따라 나아간다. 5시 40분 약간 널따란 공터가 나오면서 전망이 툭 터진다. 공터 가운데 조그만 표지석이 눈에 들어온다.

 

백화산 정상이다. 사방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희미한 공제선 상에 주위의 산정들이 눈에 들어온다. 집사람과 나는 감격스런 포옹을 하고, 서둘러 증명사진을 찍었다. 이제 160˚ 방향의 저 아래 반짝이는 전등불빛의 마을까지만 가면 오늘 등반은 성공리에 끝난다.

 

하산길에 방향을 잃다

 

능선 위로 많은 등산인들이 남긴 발자국이 있지만 바람이 거세, 언제 지워질 줄 모른다. 헤드랜턴 불빛에 의지하면서 백화산 이정표를 뒤로 하고 능선상의 발자국 따라 하산길로 접어든다.

 

등산로는 능선의 마루금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고 자주 9부 능선까지 오르내리면서 계속된다. 바람이 거세 군데군데 발자국들이 희미해졌으나 자취를 잃어버릴 정도는 아니다. 10 여 분 내려왔을까? 안부가 나오고 좌측으로 내려간 발자국이 보인다. 나의 산행지식에 의하면 안부에는 대부분 옛적에 우리의 조상들이 넘나들던 산길이 있기 마련이다. 이제 하산 길목을 찾았다는 확신이 든다.

 

“여보 !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다.”

 

바람이 없는 아늑한 곳을 찾아 저녁 취사를 위해 자리를 폈다. “고등어 찌개에 소주도 한잔하자” 하면서 나의 곁으로 바짝 붙어 앉는 집사람의 얼굴에는 행복의 미소가 가득하다. 미루는 좀 쉬었으면 싶으나 아직도 힘이 남았는지 주위를 힘차게 뛰어다닌다. 아서라, 이놈아! 발자국 다 지워진다.

 

배낭을 풀자마자 집사람은 서둘러 코펠을 열고 밥과 고등어 찌개를 끓일 준비를 한다. 버너에 불을 지피는 것은 나의 몫이다. 버너를 열고 가스연료를 조립하기 위해 가스통을 찾는다. 어! 가스가 안 보인다. 있어야 할 연료가 없다. 배낭을 다 비워보았지만 가스통은 나오지 않는다.

 

아~ 아~

 

길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평생 나 자신에게 이렇게 깊은 실망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산행 도중 간식으로 허기는 메웠지만 점심도 거른 상태라 집사람과 나 모두 탈진 상태다. 이곳은 1000m 가 넘은 능선상의 바람막이 바위 아래이고 시간은 저녁 6시가 넘었다. 컴퍼스는 있으나 지도가 없다. ‘조난’, 이라는 단어가 뇌리를 스친다.

 

망연자실하여 누워버린 나에게 집사람은 "여보! 기왕 이렇게 된 것, 어찌 하겠는가? 빨리 하산을 서두르자, 발이 너무 시리다"며 채근한다. 일어나야 한다. 일어나서 집사람과 미루를 데리고 안전하게 하산해야 한다. 힘들게 일어나 배낭을 다시 꾸린다.

 

“여보~ 탈진은 위험하니 고등어 통조림이라도 먹고 가자. 통조림은 날것이 아니지 않는가?” 고 제안하니 집사람은 “대장은 맨손으로 통조림 따는 기술 가졌어?” 하고 반문한다. 그리고 보니 등산용 칼도 보이지 않는다. 집사람의 얼굴은 실망과 절망을 넘어 모든 것을 초월해버린 것 같다.

 

안부의 좌측으로 접어들어 20여 발걸음을 내려오자 발자국이 없어진다. 다시 안부로 올라와 백두대간 능선을 바라보니 한사람의 발자국이 있으나 희미하다. 더구나 갈 길은 아득한 봉우리로 향하는 오르막길이다. 나도 오르막길은 엄두가 안 나지만 집사람을 돌아보니 더는 못 올라가겠다며 고개를 젓는다. 집사람을 설득할 자신이 없다.

 

백화산 정상에서 만덕사 방향의 마을 불빛을 향해 측정해 둔 방위각 160˚ 방향으로 무조건 하산이다. 컴퍼스를 꺼내든다. 다행히 겨울철이라 넝쿨나무들이 우거지지 않아 전진할 만하다. 시야도 조금은 트이고 하늘에는 별도 총총하다.

 

30여 분 하산했을까? 사람의 발자국을 만났다. 발자국은 하산 방향이 아니고 등고선 따라 270˚ 방향으로 난 길이다. 만덕사 건너편 능선과 만덕사 능선 사이의 계곡으로 향하는 길로 판단하고 반가운 마음에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20여 분을 발자국을 따라 걸었지만 도무지 산 밑으로 내려갈 기미가 보이질 않고 오히려 약간씩 위로 향한다.

 

또, 내가 결정해야 한다. 집사람에게 초조함을 보여서는 안 된다. “5분간 휴식” 하면서 배낭을 내리고 깔판을 꺼내 집사람에게도 권하고 나도 앉는다. 앞서가던 미루도 우리 곁으로 되돌아온다. 마지막 남은 초콜릿 서너 조각과 비스킷 몇 조각을 나, 집사람, 미루 공평하게 분배한다.

 

물은 충분하다. 상황을 알아차린 집사람이 “여보 이 길은 다시 백두대간으로 올라가는 길 같아, 뒤로 돌아 가면 우리가 오후에 올라간 만덕사 능선 길을 만나지 않을까?”하고 조심스럽게 제안한다. 내 마음을 짐작한 집사람이 고맙다.

 

이제는 피곤한 것도 모르겠다. 차라리 비스듬한 하산길 덕에 체력이 많이 회복되었다. 문제는 허기다. 물을 실컷 마시니 힘이 솟는다. 7시가 넘었다. 오던 발자국 따라 뒤로 돌아섰다. 우리 발자국과 앞에 간 발자국과 섞여 혼란스러우나 험한 경사길도 아니고 갈 만하다. 애써 태연한 척하면서 콧노래를 시작한다.

 

발자국을 처음 만난 지점을 지나 한동안 가다보니 발자국이 자주 끊긴다. 헤드랜턴에 의지하여 전진하는 우리는 자주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힘들여 발자국을 찾아 내려간다. 발자국이 갑자기 많아지고 무질서하다. 나도 모르게 “이건 사람 발자국이 아니고 짐승 발자국 아니야?” 하면서 집사람을 돌아봤다. 순간 집사람의 얼굴에선 심한 공포의 빛이 감돈다. 2시간 이상을 산속에서 헤맸다.

 

비장한 각오

 

‘발자국’ 이제 더 이상 북극성이 아니다. 오직 160˚방향으로 무조건 내려간다. 약도 오르고 오기도 나고, 악이 바친다. 길은 험해지고 마른 가시넝쿨이 자주 앞을 가로막는다. 스틱으로 쳐가면서 전진한다. 집사람이 비상용으로 헤드랜턴 하나를 끄잔다. 아마 하산 도중 건전지까지 완전 소모되어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을 염려한 모양이다.

 

아무리 늦어도 12시까지는 우리 차 있는 곳까지 갈 수 있고 우리의 헤드랜턴은 6시간 이상 사용할 수 있는 고성능 헤드랜턴이라 염려하지 말라고 달래보나 못 믿겠다는 표정이다. 엎어지고 넘어지는 불도저식의 산행을 1시간이나 했을까? 갑자기 건물의 지붕 같은 것이 랜턴의 조명 아래 불쑥 나타난다.

 

만덕사?

 

가까이 가보니 아니나 다를까, 만덕사이다. 오후 3시 20 분경에 백화산 정산을 향해 출발한 만덕사가 눈앞에 있다. 만덕사 경내에 이르니 만감이 교차한다.

 

집사람을 얼싸안으며 “여보! 뭐가 제일 먹고 싶어?” 하고 묻자, 집사람은 서슴없이 “막걸리”라고 대답한다. 가자! 막걸리 먹으러, 저녁 9시가 넘었다. 빠른 걸음으로 차에 이르고, 가은 시내에 도착하자 우선 버너용 가스를 구입하였다. 막걸리를 찾았으나 두 곳의 슈퍼 모두 막걸리가 없다. 대용으로 경주법주와 소고기 등심을 사서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가은 역 광장에 자리 잡았다.

 

나, 집사람 그리고 미루 우리 셋은 잠자리를 걷어낸 널찍한 차안에 둘러 앉아있다. 집사람과 나는 법주잔을 맞대고 미루는 잘 익은 소고기 덩어리를 물었다. 버너에는 고등어 김치 찌개가 끊고 있다. 저녁 11시이다.

 

아~ 아~ 백화산.

덧붙이는 글 | 겨울 백화산 등산기


#백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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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덕연구단지에 30년 동안 근무 후 은퇴하여 지리산골로 귀농한 전직 연구원입니다. 귀촌을 위해 은퇴시기를 중심으로 10년 전부터 준비했고, 은퇴하고 귀촌하여 2020년까지 귀촌생활의 정착을 위해 산전수전과 같이 딩굴었습니다. 이제 앞으로 10년 동안은 귀촌생활의 의미를 객관적인 견지에서 바라보며 그 느낌을 공유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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