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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을 움직인 사람들 <초대 대통령 이승만>.
 대한민국을 움직인 사람들 <초대 대통령 이승만>.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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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1 TV 다큐멘터리 '대한민국을 움직인 사람들'- <초대 대통령 이승만> 3부작(아래 <이승만 3부작>)을 시청한 소감을 간단히 말하자면 '당혹'과 착잡함'이다.

9월 28~30일에 방영된 이 다큐는 1편 '개화와 독립', 2편 '건국과 분단', 3편 '6·25와 4·19' 로 구성된 3부작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혁명가이자 정치가였던 이승만의 일대기를 다뤘다. 이승만은 개화기인 1875년에 출생하여 4·19 5년 후인 1965년에 타계했다.

주지하듯이 다큐멘터리는 실화를 모아 재구성하는 실록이다. 그리고 실록은 제재에 따라 지위가 사록이나 역사로 격상된다. 이승만이라는 중요한 인물을 제재로 삼는다면 마땅히 역사성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이승만 3부작>은 다큐로서의 실록적인 본령을 어겼을 뿐만 아니라 엄정히 추구해야 할 역사를 교묘하게 변형시켰다. 시청 소감이 당혹스럽고 착잡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서사 기법을 교묘하게 이용한 미화 다큐

먼저 <이승만 3부작>은 전편에 걸쳐 서사기법(narrative)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다. 그래서 얼핏 보아서는 이 다큐가 갖는 결함을 짚어내기가 어렵다. 요컨대 이 다큐에는 다분히 사려 깊은 '선택과 취사'가 숨겨져 있다. 그리고 이런 장치들은 온전히 이승만을 미화하려는 목적에 동원되고 있다.

시청자들은 이 다큐가 '이승만의 강점은 상세히 다루는 반면 약점은 간단히 다룬다는 점', '잘한 것은 이승만의 공이고 잘못한 것은 상황 탓으로 돌린다는 점', 어쩔 수 없이 '잘못한 일을 말하더라도 비고의적이었다고 하거나 아니면 시청자의 동정심에 호소하는 방식을 쓴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승만이 '치명적으로 잘못한 일은 아예 누락하고 있다는 점' 등을 간파해 내기가 어렵다.

작은 사례를 하나 들자면, <이승만 3부작>은 이승만이 배재학당에 입학하기 전 과거에 낙방했다는 사실을 전하면서 이는 당시 잘못된 과거제도 때문이었다고 단정한다. 하지만 이것은 근거가 박약한 추론일 따름이다. 경술국치로 나라가 망하자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한 매천 황현 같은 이는 아무런 연고나 배경도 없이 과거에 응시할 때마다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곤 했다.

터놓고, "이승만이 과거에 다섯 번씩이나 낙방한 것은 동양적 소질과 교양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낙방한 사실만 말해도 (또는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런데 그것을 굳이 당대의 불량한 제도 탓으로 돌리면서 다수의 불특정한 조상을 폄하하거나 이승만의 개화주의 및 서구편향을 옹호한다면 이는 다큐멘터리의 본령을 해치는 것이자 역사를 왜곡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실책은 잘 알려진 것만 선택, 더 큰 실책은 언급조차 없어

 대한민국을 움직인 사람들 <초대 대통령 이승만>.
 대한민국을 움직인 사람들 <초대 대통령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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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가 터지자 이승만이 서울을 떠난 시점은 전쟁 발발 46시간 만인 6월 27일 새벽 2시였다. 그는 각료들과 함께 심야특별열차 편으로 남하했다. 그런데 <이승만 3부작>은 남하 직전인 26일 밤의 시점에서, "그때까지도 이승만은 피신하라는 주변의 권고를 듣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것은 마치 이승만이 서울을 끝까지 사수하려고 노력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이어서 다큐는 이승만이 대전에 가서 국민들에게 서울 사수 방송을 했다고 간명하게 언급하고는 '한강다리 폭파 건'으로 성큼 넘어가 버린다.

터놓고, "이승만은 한국은행의 현금도 고스란히 두고 갔을 정도로 허겁지겁 도망쳤다"라고 말하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정상적인 다큐멘터리라면 최소한 '이승만이 대전에서 방송을 보내면서 마치 서울에서 방송하는 것처럼 위장했다는 점' 정도는 짚었어야 하지 않을까? 이어진 '한강다리 조기 폭파 건'은 너무도 잘 알려져 있는 이승만 정부의 실책이다. 그런데 이미 잘 알려진 실책을 굳이 상세하게 다루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이승만에 대해 비판할 것은 비판한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일 것이고 동시에 정작 비판해야 할 것을 누락하기 위한 시간 끌기가 아니었을지.

정상적인 다큐멘터리라면 6·25 이전에 이미 수만 명 이상이 죽은 제주의 4·3항쟁을 말했어야 하고, 한강다리 폭파를 말해야 할 시간을 쪼개서 이승만 정부가 남하하면서 자행한 수원, 대전 등지의 좌익 및 민간인 학살과 보도연맹 대학살을 지적했어야 옳다. AP통신은 한국전쟁 초기 학살당한 민간인이 최소 10만 명일 것이라고 추정하면서 당시 정치범은 3만 명에 불과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그런데 <이승만 3부작>은 학살에 관해 역시 알려질 대로 알려진 '거창민간인학살사건'만을 거론하면서 그것도 '체계적으로 훈련 받지 못한 병사들의 우발적 소행'인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

이승만은 없었다, '왜곡된 이승만'과 '과장된 이승만'이 있을 뿐

<이승만 3부작>은 이승만이 청년 시절 만민공동회의 연사로 활약한 일을 전하면서, 이 만민공동회의 노력으로 러시아가 조선에 대한 각종 이권을 포기했다고 말했는데 이는 왜곡 수준을 넘는 것이다. 러시아의 이권 포기는 만민공동회 때문이 아니라 러일전쟁 패배로 인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 <이승만 3부작>은 이승만이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를 만나 조선의 독립을 청원한 최초의 한국인이었다고 말한다. KBS는 이것을 첫날 방영 전에 뉴스로 보도하면서 독립운동가로서의 이승만을  부각했다. 물론 이승만이 1904년 도미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쿠데타에 가담해 감옥에 있던 이승만을 꺼내주고 도미를 주선, 지원한 것은 민영환·한규설 같은 구한말의 우국충신들이었다. 그런데 <이승만 3부작>은 이 거사를 마치 이승만 혼자 해낸 일인양 말한다.

이어서 <이승만 3부작>은 이승만이 프린스턴대학원 시절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되는 윌슨 총장과 각별한 인연을 맺었다 말한다. 그런데 과연 이것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일까? 당시 이승만은 김규식이 파견된 파리회의에 자기가 가려고 했다. 그가 파리회의의 한국대표를 자임하고 나서자 대한민국중앙총회장 안창호는 이승만을 믿고 한국 대표 자격을 부여한다.

하지만 윌슨 대통령의 각별한 제자라던 이승만은 끝내 프랑스 행 비자도 받지 못한다. 파리회의 참석 기회를 놓친 이승만은 난데없이 윌슨 대통령에게 한국 위임통치를 건의한다. 1919년 3월 19일자 <뉴욕타임스>에는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파리회의에 참석하는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청원서를 제출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승만은 한국은 당장 독립될 가망이 없고 또 독립된다고 하더라도 자치능력이 없으니 미국이 주관해 국제연맹으로 하여금 한국을 당분간 통치하게 해달라는 청원을 제출한 것이다. 그런데 <이승만 3부작>은 이승만이 위임통치를 청원한 것은 장차 독립으로 나아가기 위한 단계적 조치였다는 식으로 자의적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이승만이 상해임시정부에서 불신임되고 급기야 탄핵까지 이르게 된 것은 바로 이 위임통치론 때문이었다.

"대통령이 위임통치를 건의하는 바람에 정부 대표로 가 있는 김규식 특사가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위임통치를 요청하려면 뭐 하러 파리까지 왔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니 불필요한 오해를 낳는 위임통치 청원을 철회한다는 성명서를 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이동휘)

이에 대해 이승만은 '대통령을 비난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 위임통치 건은 지나간 일이니 철회할 의사가 없다'는 이상한 논리로 거부했다. 이후 그는 임시정부를 팽개치고 다시 미국으로 떠난다. 임시정부로서도 현장에 근무하지 않는 그를 더 이상 대통령으로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이승만이 임시정부에서 탄핵된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승만 3부작>은 임시정부의 파벌싸움 때문에 이승만이 집무를 하지 못해 떠난 것처럼 말한다. 또 애초 상해임시정부가 이승만을 초청했던 것도 은근히 그에게 미주의 독립자금을 기대했기 때문이라고 말함으로써 이역에서 풍찬노숙했던 우국지사들을 싸잡아서 폄훼해 버린다.

 <대한민국을 움직인 사람들- 초대 대통령 이승만> 편의 한 장면
 <대한민국을 움직인 사람들- 초대 대통령 이승만> 편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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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진정한 독립운동가인지 아닌지를 알게 해 주는 극적인 사건은 190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생했다. 장인환과 전명운이 가담한 통감부의 미국인 외교고문 스티븐스 저격사건이었다. 스티븐스는 일본의 조선침략을 미화, 예찬하고 다니던 제국주의의 앞잡이였다. 고국에 돌아온 그는 재미교포 전명운의 1차공격을 받은 후 장인환의 저격에 의해 피살됐다.

미주 한인회는 이승만에게 장인환 재판의 변론 통역을 요청한다. 하지만 이승만은 장인환의 방법이 폭력적이라는 이유로 거절한다. 그런데 <이승만 3부작>은 이 사건을 다루면서 이승만이 변론 통역을 거절한 것은 당시 악화된 미국의 여론 때문이었다고 얼버무렸다. 그러고는 뜬금없이 한 미국인을 내세워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고 해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범죄"라는 발언을 여과 없이 방영했다.

뿐만 아니라 <이승만 3부작>은 이승만이 안중근과 윤봉길의 거사 등에도 거부감을 토로했다는 점을 일절 말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일본제국주의를 직접 비판하지 않았다. 그러다 미일관계가 급속히 악화된 1940년에 이르러 일본에 대한 비판을 본격화했다.

4사5입 개헌은 수학자의 잘못? 4사5입 논리보다 더 희극적인 KBS 다큐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이승만은 집권 연장을 위한 개헌을 두 번 감행했다. 발췌개헌과 사사오입개헌이 그것이다. 이 두 번의 개헌은 쿠데타 수준의 불법과 폭력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4사5입' 개헌은 초대 대통령의 중임제한 규정을 철폐하는 집권 연장책으로서 박정희의 유신헌법 다음 가는 악법이라고 할 수 있다.

국회 비밀투표 결과, 재적의원 203명 중, 찬성이 135표였다. 그런데 개헌 가능 의결정족수는 재적의원의 2/3, 즉 136명이었다. 당연히 사회자였던 부의장 최순주는 부결을 선포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여기에 수학의 '4사5입'론을 적용한다. 135.33명은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으며 0.33이란 자연인으로 존재할 수 없으므로 소수점 이하는 삭제해 135명이면 통과된 것이라고 강변한다. 이 희극은 57년 전인 1954년에 벌어진 일이다.

그런데 2011년에 이 희극을 능가하는 개그가 KBS에서 벌어졌다. 지난 9월 30일 방송된 <이승만 3부작> 마지막편은 '4사5입 개헌이 추인된 것은 수학자들이 이승만에게 4사5입 논리를 주입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주장했다. KBS는 결국 '4사5입 개헌의 책임은 수학자들에게 있다'는 새로운 역사(?)를 기술한 셈이다.

1편과 2편에서는 비교적 조심스러웠던 <이승만 3부작>은 무슨 일인지 3편 '독재' 편에 들자마자 돌연 희극화되는 모습을 보인다. 3편은 이승만이 <경향신문>을 폐간시킨 사건을 다루면서 당시 이승만의 정적이었던 민주당 장면의 딸이 <경향신문> 사장의 며느리였다는 인터뷰 발언을 내보낸다. 결국 <경향신문>이 이승만 비판 기사를 정략적으로 많이 내다가 당한 것처럼 유도한 것이다.

또 이승만이 조봉암을 사형시킨 것은 '정치적 실수'였다고 가치중립적으로 주장했다. 또한 이승만의 말기 실정은 전적으로 자유당 강경파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승만은 시위 부상자를 위로하기 위해 병원에 가서야 사태를 알아차리고 울먹였다고도 했다.

이승만은 3선도 모자라 전국의 깡패를 동원하여 4선을 위한 3·15 부정선거를 감행했다. 그리고 4·19 시위 과정에서 180여 명이 죽고 6000명이 부상한 후,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는 교수 데모와 미국의 하야 압력을 받고 물러났다. 하지만 <이승만 3부작>은 그런 이승만을 '조기 용퇴한 지도자'로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이승만이 스스로 조기 하야 했기 때문에 4·19가 성공했다'는 궤변 인터뷰도 곁들여 내보냈다. 이 모두가 이승만과 4·19에 대한 획기적으로 새로운(?) 해석이어서 유달리 주목된다.

 4.19혁명 일주일 뒤인 4월 46일 이승만의 하야성명 당일 민중들이 철거한 탑골공원의 이승만 동상
 4.19혁명 일주일 뒤인 4월 46일 이승만의 하야성명 당일 민중들이 철거한 탑골공원의 이승만 동상

그들의 의도는 무엇일까

이미 KBS는 6·25 특집 다큐 형식으로 백선엽 편을 방영했다. 그는 대한민국의 육군참모총장을 두 번 역임했다. 하지만 이보다 앞서 그는 일제 만주군 간도특설부대 장교로 독립군 토벌에 가담한 친일파였다. 그리고 이번에 방영된 이승만은 독재자다. 난데없이 친일파와 독재자를 띄워 올린 KBS는 앞으로 정주영과 이병철 편도 방영하겠다고 한다. '친일'과 '독재'에 추가하여 산업화 인물을 부각시키려는 것이다.

불현듯 박정희가 떠오르지 않는가? 박정희는 '친일'과 '독재'와 '산업화'의 이력 세 가지를 함께 보유한 인물이다. 동시에 이 세 가지는 한국 보수 특유의 자질이기도 하다. 희한하게도 '민주', '민족'과는 괴리되어 있는 한국 보수는 지금 위기에 직면해 있다. 그런데 지난 선거에서 박정희 향수는 중차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바 있다. 박정희의 여식이 유력한 보수 후보로 출마하는 차기 대선도 지난 선거처럼 되기를 그들은 원망(願望)하고 있는 것이다.


#이승만#대한민국을움직인사람들#KBS#4.19#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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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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