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터 극단 산수유가 제공한 <12인의 성난 사랆들> 포스터.

▲ 포스터 극단 산수유가 제공한 <12인의 성난 사랆들> 포스터. ⓒ 극단 산수유

 
가정 폭력에 시달리던 열여섯 살 소년이 칼로 아버지를 찔러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도망쳤던 소년은 버리고 간 칼을 치우러 새벽에 집으로 돌아왔다가 대기하고 있던 경찰에게 붙잡혔다. 소년은 범행을 일체 부인했고 자신은 심야극장에 가서 혼자 영화를 보았다고 주장했지만 무슨 영화를 봤냐는 경찰의 질문엔 영화 제목이나 배우의 이름을 대지 못했다. 지문은 지워졌지만 살인에 쓰인 듯한 도구가 발견되었고 아랫집 노인과 맞은편 건물에 사는 이웃 여성의 증언도 있었다. 누가 봐도 원한에 의한 근친 살해가 틀림없었다. 

법원으로부터 배심원으로 지목된 열두 명의 시민은 재판을 모두 지켜보고 최종 판결을 내리기 위해 배심원 방으로 모였다. 거기서 소년의 유·무죄를 최종 결정하는 것이었다. 배심원들의 의견은 대체로 비슷했다. 소년이 범인인 것이 너무나 확실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8번 배심원이 손을 들며 말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소년이 정말 아버지를 정말 죽였다는 결정적 증거는 없는 것 아닙니까?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한 사람의 목숨을 죽이고 살리는 일이니까요." 

사람들은 당황한다. 너무 명약관화해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건인데 저 사람 혼자 왜 저러는 걸까. 당장 반론이 등장한다. 당신이 뭔데 판결을 뒤집자는 거야? 검사나 판사가 얼마나 똑똑한데. 그 사람들이 어련히 다 알아서 판단하지 않았겠어? 당신이 이의를 제기해서 결론이 안 나면 우리는 몇 날 며칠이고 여기 갇혀 있어야 하는데, 우리 손해를 당신이 다 책임질 거야? 

극단 산수유의 대표적인 레퍼토리인 연극 <12인의 성난 사람들>은 작가 레지날드 로우즈가 배심원으로 참가한 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TV드라마를 1957년 시드니 루멧 감독과 헨리 혼다가 함께 제작한 영화가 원작이다. 극단 산수유는 이 극을 들여와 2016년 초연 이후 2017년, 2019년, 2023년 모두 전석 매진시켰고 결국 레퍼토리 공연으로 삼게 되었다. 제4회 이데일리 문화대상 연극부문 최우수상, 월간 한국연극 선정 2016공연베스트7, 공연과 이론 작품상을 수상하는 등 작품성과 대중성을 모두 인정받은 작품이다. 

연극을 보면서 가장 공감한 건 누군가 자신과 다른 의견을 냈을 때 나타나는 반응들이다. "니가 뭔데 혼자 잘난 척이야?", "너 이거 책임질 수 있어?", "대세가 정해졌는데 튀지 말고 그냥 다수결에 따르지 그래?" 이건 재판 과정을 넘어 회사나 국가의 정책을 결정할 때도 늘 일어나는 일이다. 연극은 묻는다. 아무리 뻔해 보이는 사건도 한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이라면 다시 한번 살펴보아야 하는 것 아닌가? 아흔아홉 명의 죄인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면 안 되는 것 아닌가? 당신이라면 11대 1의 상황에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확실하지도 않은 자신의 의심을 계속 밀고 나갈 배짱이 있는가? 
 
커튼콜 2024년 5월 5일 공연이 끝나고 커튼콜 때 촬영.

▲ 커튼콜 2024년 5월 5일 공연이 끝나고 커튼콜 때 촬영. ⓒ 편성준

 
연극은 단 한 번의 무대 이동도 없이 오로지 배심원 방 안에서만 진행되므로 배우들의 합이 매우 중요한데, 어제 팀은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모두 맡은 역할을 성실하고 감동적으로 수행했다(A, B 캐스트 두 팀으로 진행되는데 A팀 공연 관람). 주인공 격인 8번 배심원 역의 한상훈은 다소 큰 키에 지식인적인 면모로 이의를 제기하는 외로운 배심원 역을 잘 해냈으며 8번과는 정반대의 입장에 서 있는 3번 배심원 역 남동진 배우의 열연은 눈이 부셨다. 인간의 선의를 믿지 않고 기성세대의 편견에 젖어 "걔들이 어떤 놈들인데?!"라며 소년을 당장 전기의자로 보내자고 부르짖는 그의 연기는 '저렇게 소리를 지르다 목이 다 쉬어버리는 것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였는데 연극이 끝나고 로비에서 멀쩡한 얼굴로 나타나 인사를 해서 신기했다.

와즈디 무아아드 원작의 <숲>에서도 느꼈지만 류주연은 극적인 상황을 효과적으로 연출함으로써 배우들의 열연을 이끌어 낼 줄 아는 연출가다. 나는 원작 영화를 아주 오래전에 보았는데 시드니 루멧 감독은 영화 세트장에 만든 방을 접점 좁게 만듦으로써 관객들이 답답하고 밀도 높은 긴장감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고 들었다. 이와 필적할 만한 효과로 류주연 연출이 선택한 것은 에어컨이었다. 극이 절정에 이를 무렵 극장의 에어컨이 꺼지고 관객들은 배심원 방에 흐르는 답답한 공기를 객석에 앉아서 함께 느끼게 된다. 드디어 만장일치로 합의를 보게 된 마지막 순간 무대 밖으로는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가 내리고 극장엔 에어컨이 가동된다. 공감각적인 카타르시스가 아닐 수 없었다. 

'전석 매진 행렬'을 계속하고 있다는 보도 자료를 읽으면서 사람들은 왜 이 시대에도 이런 연극을 보러 오는 걸까 생각해 보았다. 문명과 기술이 발전하고 민주화가 이루어졌다고 해도 우리 마음속에서는 '아직'이라고 속삭이는 것들이 남아 있기 때문 아닐까. 우리는 아직도 남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버릇이 있고, 아직도 누군가 권위 있는 사람의 결정을 기다리는 자신 없음이 있고, 튀지 말고 골치 아픈 문제에 참견하지 않으려는 비겁함이 있다. 연극은 이렇게 쳐다보기 싫은 우리의 내면을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다. 아무리 바쁘고 힘이 들어도 시간을 내 극장에서 연극을 보아야 하는 이유다. 2024년 5월 26일까지 대학로 민송아트홀 2관에서 상연한다. 보시라.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 러닝타임 : 110분
● 기간 : 2024.05.01. (수)~2024.05.26. (일)
● 시간 : 월~금 19:30, 토·일·공휴일 15:00, 19:00
● 장소 : 대학로 민송아트홀 2관
연극리뷰 셰익첵 12인의성난사람들 편성준 대학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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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피라이터 출신 작가. 『부부가 둘 다 놀고 있습니다』 등 세 권의 책을 냈고 성북동에 있는 한옥집을 고쳐 ‘성북동소행성’이라 이름 붙여 살고 있습니다. 유머와 위트 있는 글을 지향하며 출판기획자인 아내 윤혜자, 말 많은 고양이 순자와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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