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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개나리꽃이 떨어지자, 초록 이파리들이 폭죽 터지듯 올라오기 시작했다. 5월이다. 미국 동부의 봄바람은 여전히 찬 기운이 감돌지만 나무와 꽃과 새와 벌레들은 일찌감치 봄맞이에 한창이다. 

늘 5월을 앞두고는 4월 말부터 머리가 아팠는데 올해는 그런 게 없다. 요즘 인기 있는 상품을 검색할 필요도 없고, 남들이 무엇을 사는지 훔쳐볼 필요도 없고, 너무 많은 선택지 위에서 고민할 필요도 없다. 어버이날과 연이은 양가 아버지들의 생신 선물 고민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싱가포르로 이사해 부모님과 멀리 떨어져 살기 시작하면서, 처음엔 각종 상품을 주문해 부지런히 한국 어른들 댁에 보내곤 했다. 꽃바구니, 과일, 영양제, 식품 등 좋은 품질의 상품을 찾으려 애쓰며 살뜰히 챙겼다. 

여기엔 상품 검색 및 리뷰 분석, 배송 가능 유무, 수령 가능 일정 및 시간 등 고려해야 할 사항이 꽤 많았다. 내 눈으로 보지도 못한 상품을 구입해 보내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어서 그랬을까? 몇 해 전부터는 이마저도 하지 않고 용돈을 송금하고 영상 통화 한 통으로 가족 행사 챙기기를 끝냈다. 

엄마의 중년을 기억하는 내가 중년이 되었다 
 
엄마와 아빠에게 '경험'과 '시간'을 을 선물하고 싶었다. 노년의 부부(자료사진).
 엄마와 아빠에게 '경험'과 '시간'을 을 선물하고 싶었다. 노년의 부부(자료사진).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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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엄마 생신 선물로 용돈을 송금하려다 말고 잠깐 생각에 잠겼다. 현금도 꽤 괜찮은 선물이긴 하지만 이보다 더 의미 있는 선물은 없을까? 근처에 살았다면 근사한 식당에 가서 맛있는 식사도 하고, 유행하는 겨울 코트도 하나 사드렸을 텐데 이런 소소한 일을 생신 때 할 수 없으니 아쉬운 마음은 당연히 따라왔다. 

선물로 드릴 수 있는 것을 고민하기 전, 나라는 사람이 엄마에게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면 좋을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나는 엄마에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내 마음도 들여다봤다.

나를 통해 엄마가 무엇을 얻으면 좋을지, 무엇을 느끼기를 바라는 지도 생각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머릿속에 가득했던 희뿌연 안개가 걷히고 맑고 높은 가을 하늘 같은 배경이 펼쳐졌다.

엄마에게 '경험'을 선물하고 싶었다. 사는 게 갑갑하고 막막해서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배우고 느끼는 데 주저하기만 한 엄마에게 새로운 '시간'을 주고 싶었다. 그리고 쓸모없다고 여기는 엄마의 감각을 조금이나마 깨워주고 싶었다. 내가 선물한 '시간'을 통해 새로운 '경험'을 하고 무뎌진 엄마의 감각을 일깨울 수 있다면 참 괜찮은 선물이 아닐까. 

주변을 돌아보면 쉰이 넘어가는 인생 선배들은 다들 제2의, 제3의 인생을 위해 부지런히 움직인다. 금전적인 노후 준비와 함께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도전하고 싶은 것을 잘 버무린 인생 전반의 노후 준비를 위해 분주하다. 그들을 보며 나의 노후를 준비하는 미래의 나를 떠올리기도 하지만 그즈음 막다른 벽을 느꼈을 엄마를 떠올리는 경우가 더 많다. 

예상하지 않은 엄마의 중년, 그럼에도 잘 버티고 있다 

엄마가 서른넷에 낳아 키운 막냇동생은 엄마가 쉰넷이 된 봄에 장애를 얻었다. 쉰넷, 어릴 때 그 나이를 생각하면 노인 같았는데... 40대에 들어선 지금 내 나이에서 보면 여전히 뭐든 해볼 만한 나이다.

그때부터 엄마는 재활병원에서 동생과 살다시피 했고, 동생을 일으켜 세우고 걷게 하기 위해서 앉아서 편히 쉴 몸과 마음의 여유를 가지지 못했다.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간 동생을 돌보며 엄마의 노후 준비는 산산이 부서지는 파도처럼 사라졌다. 살아낼 오늘만 존재할 뿐이었다. 

그로부터 16년이 흘렀다. 엄마는 친구, 지인들과 과거처럼 자주 교류하지 않는다. 엄마는 티브이를 보다 웃긴 장면에서 잠깐 웃다가도 자식이 힘들어하는데 이렇게 웃어도 되냐며 자책한다. 엄마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 즐거운 일에서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한다. 엄마의 자식 하나가 덜 행복하게 살고 있기에 엄마도 불행해야 한다고 여긴다.

엄마는 그녀의 취향을 찾을 겨를도 없었고, 꿈꾸는 노후를 그리지도 못했고, 많은 사람들이 따라 하는 유행을 좇아가지도 못했다. 스스로 만들어낼 에너지도, 심적 여유도 없이 바스락거리는 낙엽처럼 말라갔다. 

봄이 오면 겨우내 옹송그린 나무줄기에 물이 차오르고, 묵직한 흙을 뚫고 올라온 새싹이 낯을 보여주고, 축포를 터뜨리듯 꽃송이들이 만개한다. 그렇게 차오르는 생명력을 눈으로 확인하듯 엄마의 몸에도 새로운 기운이 감도는 '시간'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일흔을 내다보는 엄마에게 필요한 '시간'

그리하여 엄마 생신 선물로 '맘마미아' 뮤지컬 티켓을 예매했다. 엄마, 아빠 두 분이 단정하게 차려입고 공연장에 가서 티켓 수령도 직접 하고, 뮤지컬을 관람하러 온 사람들을 구경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뮤지컬 내내 아바(ABBA)의 노래에 손뼉을 치고 어깨춤을 추며 세상 근심 모두 날려버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집으로 향하는 부모님의 발걸음을 상상했었다. 
 
우리집에서도 가장 인기있는 뮤지컬이 바로 '맘마미아'이다. 아바(ABBA)의 노래에는 희노애락이 모두 담겨있다. 뮤지컬 맘마미아 공연 중 사진(2019년, 사진출처 신시컴퍼니).
 우리집에서도 가장 인기있는 뮤지컬이 바로 '맘마미아'이다. 아바(ABBA)의 노래에는 희노애락이 모두 담겨있다. 뮤지컬 맘마미아 공연 중 사진(2019년, 사진출처 신시컴퍼니).
ⓒ 신시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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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어르신들은 젊은 세대보다 소비도 왕성하고, 수준 높은 공연도 즐긴다고들 한다. 하지만 나의 부모님은 본인이 직접 영화 티켓을 예매하고 관람할 여유도 없고, 오티티(OTT)를 즐기는 방법도 모른다. 

그저 집에 있는 티브이에서 방영되는 드라마나 영화가 그들이 보는 문화 콘텐츠의 전부이다. 누구나 나이를 먹지만, 나이 드는 모두가 고상하고 근사한 노후를 보내지는 않는다. 

"엄마, 공연 어땠어?" 
"정말 신나더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봤어. 뮤지컬 공연 보러 온 사람들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어. 다들 부지런히 재미있는 것들 찾아다니며 사는 것 같아. 진짜 귀한 시간이었어." 


내가 상상한 모든 것을 엄마는 했고, 기분 좋은 후기를 들려줬다. 엄마는 내가 드린 '시간'을 오롯이 즐겼고, 기분 좋은 기억을 몸과 마음에 채웠다. 선물을 고민하며 내가 바랬던 바 그대로였다. 

기억 속 아빠를 소환해 주는 '김창완밴드' 

올해 어버이날과 6월 아빠 생신 선물로 '김창완밴드'의 공연을 예매했다. 어린 시절 아빠 차에는 산울림의 노래 테이프가 많았다.

산울림의 ' 안녕',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회상', '청춘', '개구쟁이', '꼬마야'를 아빠 차에서 처음 들었던 나는 산울림의 노래에 담긴 기타 소리와 특이한 전자음, 가수 김창완의 목소리를 좋아했다.
 
어릴 때부터 산울림의 노래를 들어서일까? 가수 김창완을 보면 아빠가 생각난다. 사진은 가수 김창완이 2023년 11월 서울 마포구 벨로주 홍대에서 열린 독집앨범 '나는 지구인이다' 발매 기자간담회에서 연주를 선보이는 모습.
 어릴 때부터 산울림의 노래를 들어서일까? 가수 김창완을 보면 아빠가 생각난다. 사진은 가수 김창완이 2023년 11월 서울 마포구 벨로주 홍대에서 열린 독집앨범 '나는 지구인이다' 발매 기자간담회에서 연주를 선보이는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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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얼마큼 김창완밴드를 좋아하시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공연 시간만큼은 예전 삼십 대의 아빠로 돌아가 청춘을 다시 즐길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공연을 통해서, 지금은 칠순이 넘은 아빠가 예전 삼십 대의 아빠에게 '앞으로 예상치 않은 일이 인생에 펼쳐지더라도 쉽사리 무너지지 않고 잘 이겨 나갈 테니 괜찮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엄마 아빠에게 이번 어버이날 선물이 무엇인지 알려드리며, '앞으로 어버이날과 엄마 아빠 생신 때 각종 공연을 즐길 기회를 선사하겠다'고 한마디 덧붙였다. 

이건 공연을 보러 가기 전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공연장에서 그 누구보다 즐겁게 공연을 즐기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잠시라도 세상 근심 걱정 모두 날려버리는 '시간'을 부모님께 선사하겠다는 내 다짐과도 같은 말이다.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나이를 뒤따라가다 보니 손에 잡힐 듯 선명한 엄마가 보인다. 부모에 대해 나날이 애틋해지는 내 마음은 덤으로 봄바람에 실어 한국으로 보낸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에도 게재됩니다.


태그:#미국, #보스턴, #어버이날, #부모님선물, #공연티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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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보스턴에 자리 잡은 엄마, 글쟁이, 전직 마케터. 살고 싶은 세상을 찾아다니다 어디든지 잘 사는 모습을 발견하는 재미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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