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화의 화제가 있는 민영익의 '묵란'
황정수
민영익은 생부 민태호의 가르침으로 어려서는 추사 김정희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실제 그의 예술 세계는 중국에서 망명하는 동안 그곳 서화가들과 어울리며 완성된다. 그는 상해에서 중국 부인과 살며 매우 좋은 집에서 살았는데, 그의 집에는 많은 중국 서화가들이 몰려들었다. 이때 그의 집 이름이 유명한 '천심죽재(千尋竹齋)'였다.
중국 서화가들 중 특히 오창석(吳昌碩, 1844-1927)과의 만남은 민영익의 예술을 진일보하게 하였다. 청나라의 대표적인 서화가인 오창석은 민영익에게 서화를 가르치기도 하였지만, 미술에 대한 식견을 넓히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한 민영익이 사용할 인장을 많이 새겨 주기도 하였다. 이는 한편으로 민영익의 삶이 그만큼 호사스러웠다는 의미도 된다.
난초와 대나무 그림에 능했던 서화가 포화(蒲華1830-1911)도 민영익의 예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이다. 두 사람은 늘 가까이 하며 서화를 함께 하였다. 특히 두 사람은 난초와 화제를 나누어 함께 하기를 즐겼는데, 주로 민영익이 난초를 그리고 포화가 화제를 썼다. 그래서 현전하는 민영익의 그림에 포화의 글씨가 얹혀 있는 것이 많다. 이밖에 서신주(徐新周) 등 상해의 여러 서화가들과도 교유하며 많은 공부를 하였다.
민영익은 상해 서화가들과 교유하며 자신만의 독자적인 서화세계를 완성한다. 그는 난초 그림과 대나무 그림에 전념하여 청나라 화가들 못지않은 미술 세계를 이루었다. 특히 그의 난초 그림은 일세를 풍미하였는데, 너나 할 것 없어 '운미란(芸楣蘭)'이라 불렀다. 그의 난초 그림은 난 잎이 살찌고 마른 변화가 적고, 세 번 꺾어 그린다는 삼전법(三轉法)도 없이 난 잎이 곧으면서 힘 있게 곡선을 그린다.
이러한 난초 치는 법은 날렵한 기교를 보여주지는 않아 순간적으로 다가오는 자극적인 매력은 적지만, 난초의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외유내강의 기품을 살려 높은 격조를 보인다. 더욱이 추사나 석파는 먹을 아껴 마른 난초를 그리는 것에 비해, 민영익은 먹을 듬뿍 써서 촉촉한 느낌으로 그려 넉넉한 품격을 느끼게 한다.
이밖에 민영익의 그림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의 난초 그림 중에는 뿌리가 밖으로 드러난 '노근란(露根蘭)'이란 것이 있고, 대나무 그림 중에는 잎이 아래로 처지는 독특한 형식의 그림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양식은 모두 망명 생활을 하는 자신의 처지를 상징적으로 대변한 것이라는 평가를 하기도 한다.
한국 미술계에 끼친 영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