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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비극은 진실이 사라진 시대, 말이 실종된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이다. 누가 국민들에게 잃어버린 말, 참말을 찾아 전해줄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한국의 대표신문, 한국의 대표언론은 바로 이 잃어버린 말, 순도 높은 말을 국민들에게 되찾아주는 신문, 언론이 될 것이다."

 

곧 퇴임을 앞두고 있는 고영재 <경향신문> 사장의 말이다. 고영재 사장은 5월 말, 혹은 6월 초에 임기 2년의 사장직을 마치게 된다. 그는 지난 3월 말 대표이사 연임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경향신문>을 지켜본 사람들은 당연히 그가 연임에 나서지 않겠느냐고 보았다. <경향신문>의 지면과 경영에 많은 긍정적 변화가 있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접었다. <경향> 외부의 시각에선 조금은 의외일 수 있었다. 퇴임을 앞두고 있는 고영재 사장을 만났다.

 

참말 추구하는 '강소신문'이 모든 미디어의 원천

 

지난 2년 동안 독립언론 <경향>의 활로 찾기에 부심해온 고영재 사장은 그 전망에 있어서 낙관적이었다. 한국 대표언론의 자리는 미디어 장르별로 보자면 '신문'이 차지할 개연성이 크다고 보았다.

 

정보홍수시대에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가를 간결하고 명확하게 또 깊이있게 전달할 수 있는 미디어가 바로 신문이기 때문에, 신문이 대한민국 대표언론의 자리를 차지할 개연성이 크다고 확신했다.

 

고영재 사장은 "신문의 DNA와 그 제작시스템, 신문에 종사하는 언론인들의 사고의 구조와 정보생산시스템이 그 어떤 미디어보다도 앞으로 더 경쟁력이 있을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물론 그 전제가 있다. 시대와 국민들이 요구하는 '참말'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제시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경주할 때 그 가능성이 열릴 것이라고 보았다.

 

고영재 사장은 바로 그런 점에서 <경향신문>이 가장 유리할 수 있다고도 했다. <경향신문>의 '자유로운 영혼'이 한국의 대표신문, 대표언론에 가장 근접할 수 있는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자부였다.

 

고영재 사장은 독립언론, 특히 독립신문의 길도 낙관했다. 미디어의 콘셉트 자체가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신문의 부수가 더 이상 신문의 영향력을 재는 척도가 될 수 없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것이다. 참말을 추구하는 작지만 강한 신문, '강소신문'이야말로 앞으로 모든 미디어의 '원천'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했다. 독자는 이제 '신문'이 아니라 '참말' '순도높은 정보'를 원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광고주와 자본의 시각도 더불어 바뀌고 있음을 직감한다고도 했다. 기업과 광고주의 입장에서도 '건강한 언론'에 대한 갈구가 큰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아직 생각만큼 몸이 따라가지 못하는 '지체현상'이 있지만, 조만간 급속한 변화가 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고 사장은 한국 사회에서 미디어의 활로는 '새로운 것'을 찾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의 '순수성' '정체성'을 되찾는 데서부터 개척될 수 있다고 믿었다. '참말' '순도높은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느냐가 그 어떤 미디어 전략보다도 중요하고, 앞으로 결정적인 관건이 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고영재 사장과의 인터뷰는 사실은 피하고 싶기도 했다. 누군가 대신 해주었으면 했다. 고영재 사장과는 꽤 먼 길을 함께 걸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전남 장흥까지, 강원도 길을, 경상도 산골길을, 또 민통선 남쪽 길을 같이 걸었다. 그런 마당에 공식 인터뷰는 서로에게 자연스럽지 않은, 껄끄러운 일일 수 있었다.

 

하지만, 하자고 했다. <경향신문> 사장으로 취임한 뒤에도 꽤 길을 같이 걸었지만, 그 길 위에서 <경향신문>과 '언론'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꺼낸 적은 거의 없었다. 사실 길 위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화제들이다. 지금 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하지 못할 것이다.

 

궁금했다. 2년여 <경향신문> 대표이사로서, 독립언론 경영자로서 과연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어떤 길을 열어 왔는지, 또 어떤 길이 가능하다고 보았는지 묻고자 했다.

 

인터뷰는 지난 9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 사장실에서 있었다. 질문과 답변의 순서는 일부 조정했다.

 

<경향> 식구들의 긍지와 자부심이 가장 큰 성취

 

- 지난 4월 초에 연임에 나서지 않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경향> 외부에서는 왜 그랬을까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는데요. 

"경향신문 구성원들이 간절하게 원하지는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이 한 마디로 답변을 대신했다. 경영 측면에서 나름대로 성과를 내기도 했지만, 사원들의 호주머니 사정을 두둑하게 만들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결정적인 호전'에 이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운 대목일 수 있겠다. 하지만, 아쉬운 대목은 없다고 했다. 최고경영자는 '최선을 다할 책무'만 있을 뿐이라는 말로 대신했다.

 

-그렇다면 지난 2년여 동안 최고경영자로서 의미있는 성취나 진전으로는 무엇을 꼽을 수 있을지요. 

"경향신문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커졌다고 봅니다. 물론 '지면이 완전하다, 흠결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저널리즘의 원칙을 지키고 저널리즘이 가야할 길을 향해서 열심히 노력했고, 그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편집국 간부들이나 기자들을 만났을 때 이런 말을 자주 했습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신문이 없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언론의 자리가 공석으로 남아 있다는 말을 말이죠. 그 나라를 대표할 신문이나 언론이 없다는 것은 나라의 비극이자 시대의 비극입니다."

 

고 사장은 적어도 "<경향신문> 식구들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신문에 가까이 가고 있다는 긍지와 자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평가했다. 그것이야말로 고 사장 자신의 가장 큰 성취일 수 있겠다.

 

고 사장 취임 이후 <경향신문>에 대한 평가는 크게 달라졌다. 무엇보다 지면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다. 진보의 시각에서 지식인과 진보의 문제를 다룬 기획을 비롯해 힘있는 집중적 기획과 도발적인 문제 제기로 화제를 모았다.

 

<경향신문> 지면의 이런 변화는 최근 독자들의 반응으로 이어지고 있다. 올해 들어 지난 1~3월 동안 자발적 구독자 수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늘었다. 또 며칠 전 <경향신문>이 미국의 동물성 사료기준 완화 소식을 단독 보도했을 때는 하루 자진 구독자 수가 지난해 한 달 평균치를 웃돌기도 했다. 독자들의 반응이 그만큼 뜨겁다는 이야기다.

 

'자유로운 영혼'이야말로 <경향>의 가장 중요한 밑천

 

- 경향 지면의 변화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많습니다. 같은 기자들이 만드는 것인데, 어떻게 이런 변화가 가능했다고 보는지요?

"<경향>의 힘을, 가능성을 현실화할 수 있었던 데 사장이 다소 기여할 수는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또 지면 개선을 위해 특히 사장이 할 수 있는 일에는 분명하게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잠재력과 가능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마도 지면에 관해서 사장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편집국장을 포함해 기자들을 만나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면에 관심은 갖겠다. 그러나 간섭은 하지 않겠다.'"

 

발행인이기도 한 사장이 지면에 전혀 개입하지 않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또 그것이 꼭 바람직한 일일까? 편집권은 발행인과 사주에 있다는 식의 주장을 펴고 있는 족벌사주의 주장과는 별개로 이 문제는 <경향신문>이나 <한겨레> 같은 독립언론에서도 중요한 쟁점이자 현실적인 쟁점일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한 고영재 사장의 입장은 간명했다.

 

기본적으로 발행인이 신문 지면에 대한 최종 책임을 지고 있지만, 또 편집과 경영의 분리 문제 논쟁적일 수 있지만 "지면에 대한 최고 책임자로서, 또 최고의 지면을 만들기 위한 전략적 선택으로 '지면에 관심은 갖되 간섭하지 않는 전략'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고 사장은 <경향> 가능성의 원천이자 저력으로 <경향>만의 '자유로운 문화'를 들었다. 기자들의 영혼이 그만큼 자유롭다는 것이다.

 

<경향>은 오는 10월 창간 62주년을 맞는다. 4·19 때는 대한민국 '최고의 신문'이라는 평판을 얻기도 했지만, 박정희 정권과 유신, 전두환 정권 시절에는 '정부 기관지'라는 오욕과 굴절의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또 한 때는 재벌신문의 길을 걷기도 했다. 그런 신문에서 어떻게 '자유로운 영혼'이, '자유로운 문화'가 꽃필 수 있었던 것일까?

 

"그게 생명의 메카니즘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안팎의 요인에 의해 질병을 앓게 되는데, 그것을 극복하면 더 강한 생명력을 얻게 됩니다. <경향신문>, 오욕의 역사도 많았고, 굴욕이 곳곳에 남아 있지만 그것에 매몰되지 않고 극복해온 저력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경향>의 자유로운 영혼의 바탕입니다."

 

고영재 사장은  이 '자유로운 영혼'이야말로 <경향>의 가장 중요한 밑천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경향>이 한국 신문을, 한국 언론을 대표할 가능성의 원천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했다.

 

독립언론으로서 <경향>의 길 찾기는 어떤 면에선 곧 한국 '언론'의 길 찾기이자, 디지털 시대 '신문'의 길 찾기나 다름없을 것이다.

 

"신문 부수로 영향력 따지는 시대는 지나갔다"

 

- 사장에 취임하면서 '강소신문'의 방향을 제시하셨는데.

"'강소신문'이란 한마디로 부수는 작지만 영향력 있는 신문을 말합니다. 100만부, 200만부 등 종이신문의 부수가 영향력을 상징하는 숫자의 개념은 이미 상실했습니다. 신문의 영향력이 오프라인 구독숫자로 상징되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종이신문에서 제공된 정보는 이제 다양한 루트를 통해서 국민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종이신문 그 자체 구독자 수는 줄지언정 종이신문이 제시한 이슈와 정보가 수백만명에게 영향을 미치는 현실이 이미 전개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신문의 패러다임과 그 지형이 바뀌고 있다는 이야기다. 조중동의 과점시대가 끝나가고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종이신문, 그 자체의 미래가 과연 있을 것인가?

 

"길은 있다고 봅니다. 신문의 어려움에 대해, 종이신문의 어려움에 대해 당연히 비관적인 전망 있지만, 단기적 단편적으로 보았을 때 그런 진단이 맞지만, 장기적으로 총체적으로 조감을 하자면 낙관적입니다. 다만 그 출발점이 중요합니다."

 

고영재 사장은 결국 "시대가, 국민들이 목말라하는 것을 신문이 충족시켜 줄 수 있느냐"는 데 종이신문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보았다. 그는 또 디지털시대, 정보홍수 시대여서 바로 '신문'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미디어의 컨셉이 바뀌고 있는 시대입니다. 시장 자체가 전혀 다른 시장이 있을 수 있습니다. 경영의 모델 역시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종이신문·방송·통신, 이렇게 단선적으로 구부분하고 비교하는 것이 통하지 않는 시대를 맞게 될 것입니다. 강소신문이 중요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디지털 시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정보홍수시대라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거기에 참과 거짓의 구분조차 어려운 혼돈의 시대를 맞고 있다. 한국 언론, 특히 한국 신문의 가능성은 바로 이같은 디지털 시대 한국 사회의 혼돈에서, 시대의 혼란 속에서 찾을 수 있다는 진단이기도 했다.

 

"정보홍수시대에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이냐에 대한 답이 없는 시대입니다. 그 답을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을 보자면 신문의 DNA, 제작시스템, 신문에 종사하는 언론인들의 사고구조, 정보생산시스템이 그 어떤 미디어 장르보다 경쟁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지금 진실이 사라진 시대, 말이 실종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누가 국민들에게 잃어버린 말을 되찾아  전해줄 수 있을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참 말을 전해줄 수 있는 매체를 만드는 것이 새로운 미디어, 새로운 미디어환경에 적응하는 새로운 모델을 만드는 것 이상으로 중요다고 봅니다."

 

참말을 되찾을 수 있다면, 잃어버린 말의 진정성을 복구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이른바 신문업계가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 '뉴미디어전략'이나 '경영의 모델'은 저절로 나올 것이라는 낙관이기도 했다.

 

"새로운 미디어 환경은 '독립 신문'에 유리하다"

 

고영재 사장은 돈 많은 '부자신문'들의 이른바 문어발식 뉴미디어전략에 대해서는 실패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했다. 왜냐하면 디지털 시대의 특성에 맞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디지털 시대의 특성은 도약과 전환입니다. 새로운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의표를 찌르는 새로운 발상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 유럽이나 미국의 것을 따라 하는 것은 비경제적이며 비효율적인 전술입니다. 세계 최초의 모델이 대한민국에서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당연히 그런 '세계 최초의 모델'은 바로 자유로움과 유연성에서 나올 수 있고, "경향신문과 같은 자유로운 영혼의 집단에서 나올 개연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모델이 가능하다고 보는지요?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독립된 매체 장르로서의 모델입니다. 또 하나는 시스템입니다. 디지털 시대의 정보 유통 시스템입니다. '확실한 콘텐츠'는 영향력을 갖게 될 것이며, 이는 새로운 장르의 매체와 새로운 정보유통시스템을 통해 '작지만 원천적인 힘'을 가질 수 있습니다."

 

결국 '확실한 콘텐츠'가 문제다. 무엇이 확실한 콘텐츠인가? 시대와 국민들이 갈구하는 것, 참말,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념지을 수 있을까?

 

"참말이라고 하면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정치적인 말로 한정짓기 쉽지만, 그것을 포함해 '정보의 순도가 높은 말'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듯합니다. 우리나라는 언론을 포함해 말의 순도가 형편없이 떨어져 있습니다. 50%의 순도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말의 순도를 높이는 것, 그 작업이 중요하고, 앞으로 미디어의 활로 모색에서도 가장 중요한 핵심 요소가 될 것입니다."

 

과연 그럴 수 있는 것일까? 미디어의 활로는 광고주들에게 달려 있는 것은 아닐까? 구매력이 높은 독자들을 얼마나 많이 확보하느냐가 중요하다면, 이들 구매력 있는 독자들에게 '돈이 되는 정보'를 어떻게 전달하느냐에 따라 미디어의 부침도 결정된다고 하는 '현실론'도 만만치 않다.

 

"결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두 가지 측면에서 그렇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종이신문 부수를 가지고 영향력을 측정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지금은 활자로 인쇄된 신문을 읽는 사람만을 독자로 생각할 수 없는 시대입니다. 신문의 영향력. 종이신문을 읽지 않지만, 작은 신문을 읽는 독자는 10배, 100배일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옛날에는 신문이 거짓말을 하더라도 많은 독자를 갖고 있으면 그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그런 시대는 사라질 것입니다. 이미 그런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독자들은 더 이상 '신문의 포로'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독자들이 신문·방송·통신 가릴 것 없이 미디어 혹은 캐리어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이야기다. 그 모든 미디어는 이제 그 '알맹이'로 승부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이야기인 듯도 싶었다.

 

고영재 사장은 그런 점에서 '신문'의 미래가, 또 '독립언론'의 가능성이 있다는 '역설'을 폈다. 과거와 오늘의 시각에서는 '불리한 여건'이 미래에는 '유리한 조건'으로 바뀌고 있다는 역설이다.

 

"과거와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독립언론에게는 당연히 불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본과 권력에서 독립적이니까요. 하지만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서는 그렇기 때문에 독립 언론의 생존 가능성이 훨씬 높아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권력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고, 권력의 간섭이나 자본의 간섭에서 멀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과거와 오늘의 관점에서는 불리할 수 있으나 미래의 관점에서는 전혀 반대입니다."

 

-<경향신문>이나 <한겨레> 같은 신문의 경우 주인이 없어서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경영 리더십을 행사하기 어려운 약점이 지적되기도 하는데요.

"오너십이 유리한 점 있습니다. 집중적이고 안정적인 리더십의 장점이 분명 있을 수 있습니다. 단 좋은 쪽으로 발휘될 때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를 보십시오. 장시간에 걸쳐 강력하고 안정적인 리더십이 잘못된 방향으로 간다면 엄청난 마이너스입니다. 언론은 또 다른 기업과는 달리 가치체계를 놓고 벌이는 시장을 상대로 하기 때문에 가치체계와 무관하게 성공할 수 있는 다른 제조업과는 다릅니다. 언론기업 오너의 가치관이 정립돼 있지 않다면 언론은 사회의 공기가 아니라, 사회적 흉기로 악용될 가능성이 큽니다.

 

반대로 <경향신문>이나 <한겨레>처럼 오너십이 없는 경우에 집중력에서 취약한 측면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율적으로 작동하는 조직의 생명력의 강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스스로 행동하고, 스스로 회복하는 자연의 치유력이 위대한 것처럼 그 맹점과 약점을 스스로 보완하고 치유하는 능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진화의 과정을 충분히 겪어 나갈 수 있다고 봅니다. 시간은 좀 필요할 수 있겠죠. 오너십이 없다는 것이 결코 <경향>이나 <한겨레>의 약점이 될 수는 없다고 봅니다."

 

 

미디어의 승패는 '말의 순도' '정보의 순도'에 달려

 

고영재 사장은 독립언론의 진로와 전망에 대해, 나아가 종이신문의 미래를 예측하는 데 있어서 생명체의 운동법칙을 강조했다. 생명체의 운동법칙은 직선운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상승과 하강을 되풀이하는 것이 생명운동의 일반적 법칙이다. 당장은 제자리걸음을 하거나 혹은 뒷걸음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생명력의 방향, 경향이다. 생명력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고영재 사장은 또 한국 사회에서 미디어의 승패는 '말의 순도' '정보의 순도'를 누가 얼마나 높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순도높은 말과 정보에 대한 시대와 사회의 욕구가 그만큼 강렬하다는 이야기였다.

 

그의 메시지는 한마디로 '순도높은 언론'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순도높은 언론은 뭐라고 지칭할 수 있을까? 진보언론, 혹은 개혁언론? 고 사장의 답변은 간결했다.

 

"그냥 언론이면 됩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독립언론'이란 말 대신에 '건강한 언론'이라는 말을 쓰고 싶다고 했다.

 

그는 '건강한 언론'의 미래는 밝다고 낙관했다. <경향신문> 같은 경우도 "5년 안에 고난의 행군을 마칠 수 있을 것"으로 낙관했다. <경향> 뿐만 아니라 <한겨레> 같은 경우도 뚜렷한 '호전의 징후'가 있다고 보았다. 재계나 기업인들 사이에서도 '건강한 언론'에 대한 갈망과 욕구는 무척 크다고 했다. 다만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따름이다.

 

그런 고영재 사장인데, 왜 연임하지 않겠다고 했을까? 고 사장은 그런 종류의 호기심에는 언급을 회피했다. 혹여 선거과정에 미칠 수 있는 파장 때문에라도 적절치 않다고 했다.

 

다만 고영재 사장이 지난 3월 말 연임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하며 사원들에게 보낸 글을 통해 그의 심중을 미루어 짐작할 수는 있을 것 같다. 그의 글을 여기에 전재한다.

 

그의 연임 여부와 무관하게 그의 글은 '경향 식구들' 뿐만 아니라, 이 시대 한국 사회에서 독립언론의 미래에 대해, 언론의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그리고 그 생존방식과 관련해 건강한 언론을 소망하는 모든 분들에게 일독을 권할 만 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존경하는 사원 여러분

 

저는 오늘 경향신문 차기 대표 이사 후보로서의 자격을 스스로 버리고자 합니다. 저는 냉정하게 지난 2년을 되돌아보았습니다. 경향신문 경영의 어려움을 타개하는 데 결정적인, 획기적인 해답을 내놓지 못했다는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입니다.

 

할 말이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지난 2년 동안 이루어진 '경영판단'의 적정성, 경영호전의 가능성, 미래에 대비한 몇 가지 성과 등은 실로 냉정한 평가의 대상들입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항변의 논리를 펴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믿습니다. 지난 2년 동안 사원들의 호주머니 사장을 결정적으로 호전시키지 못한 점을 안타깝게 생각할 따름입니다.

 

사원 여러분

 

저는 대표이사 연임을 포기함으로써, 경향의 조직문화, 특히 선거 문화를 한 단계 진전시키고 진정한 독립언론의 기틀을 다지는 데 작은 보탬이 되고자 합니다.

 

회사 운영과 관리 책임자로서 대표 이사 경선 과정을 냉철한 시선과 자세로 지켜보고자 합니다. 대표 이사 경선은 회사의 운명을 가름하는 막중한 행사이기 때문입니다. 천박한 정치 놀음의 마당이 아니라 경향 진화의 축제로 가꾸어가기를 소망합니다. '독립언론'의 얼굴, 대한민국 대표언론의 최고 책임자를 뽑는다는 자부심과 경건한 마음을 잊어서야 되겠습니까.

 

선거제도는 민주주의의 꽃으로 일컬어집니다. 선거는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제도인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선거 제도가 민주주의를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뒷전에서의 은밀한 속삭임이나 '끼리끼리 문화'는 마땅히 청산돼야 할 어두운 유산들입니다. 우리는 시골 마을 이장을 뽑는 것이 아닙니다. 지면의 정체성 확보, 경영 모델의 혁신, 미래의 미디어전략, 조직력의 창조적 재편 등 당면 과제에 집중하는 성숙한 문화, 아름다운 '정치'를 기대합니다.

 

지면의 정체성은 독립 언론 경향의 생명이라고 믿습니다. 경향에 대한 사회적 평가는 높습니다. 기대 어린 눈초리가 경향에 집중되고 있음을 느낍니다. 머지않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신문의 자리를 차지하리라는 기대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경향의 홀로서기만으로는 독립 언론이 될 수 없습니다. 새로운 경영 모델도, 앞으로 다양하게 펼쳐질 사업부문도, 미래의 미디어전략도 경향에 대한 신뢰가 성공의 절대적인 전제조건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지면의 완성을 방해하는, 지면의 정체성을 훼손할 수 있는 위험성은 도처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위험한 것은 우리 스스로 지면의 가치에 대해 회의하는 일입니다. "지면이 밥 먹여주는가. 지면을 다소 양보해서라도 '돈줄'이, '빵'이 보장된다면 양보의 미덕을 발휘해도 되는 것 아닌가." 참으로 위험한 발상입니다. 썩은 정신으로 건강한 육신을 가꿀 수 없는 일입니다. 꿩도, 매도 잃는 어리석은 사냥꾼 이야기가 남의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경영과 지면, 빵과 경향정신은 '한 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은 살 수 있겠지만 결코 내일은 보장할 수 없는 선택을 우리는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새로운 경영모델의 확립은 실로 지난한 일입니다. 디지털 문화의 '무차별 공습', 자본주의 시장원리를 무시한 한국 신문시장의 특수성은 우리를 옥죄고 있습니다. 백마 탄 왕자가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나 일거에 모순을 해결하는 상황은 결코 연출될 수 없습니다. 긴 눈으로 치밀하게 기초를 다지는 인내가 필요한 영역입니다.

 

미래의 미디어전략은 사막에서 바늘 찾는 작업에 비견되는 어려운 작업입니다. 미디어 융합의 시대를 맞아 많은 투자와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해답은 아직 어디에도 없습니다. 맹목적인 모방은 '백전백패'의 길입니다. 창조적 발상을 매개로, 장르를 초월한 미디어와 미디어의 전략적 제휴, 자본과 미디어의 결합에 답이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저는 미디어 선진국이 반드시 미래의 미디어를 창출할 것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날 필요를 느낍니다. 대한민국은 이미 새로운 미디어 창출의 토양과 분위기를 갖췄다고 판단합니다.

 

경향의 조직력을 냉정하게 판단할 때, 경향의 잠재력을 십이분 발휘할 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데 동의하리라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번 선거는 그 미약한 조직력을 더욱 축내느냐, 추스르느냐를 가름하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지대한 관심과 주목의 대상입니다.

 

사원 여러분.

 

무수한 눈초리가 경향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정치권과 재계, 학계, 사회 시민단체들이 경향의 선택과 행보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경향은 믿음과 희망의 보루이자, 두려움과 경계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독립언론 10년을 맞이한 경향신문이 진정한 독립 언론의 가능성을 확인하는 엄중한 순간입니다.

 

작지만 강한 신문, 시대와 함께 하는 아름다운 신문, 경향신문의 내일을 위해 한층 깊이 고뇌하고 의연하게 행동할 사원 여러분께 경의를 표합니다.

 

감사합니다.

 

2008년 3월 31일

 

사장 고영재


태그:#고영재, #경향신문, #독립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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