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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렸다. 19일 포항시 연일읍에 위치한 영일고등학교를 찾아 가는 길, 형산강변으로 투명하게 일어서는 건물 사이로 봄기운이 스미고 있었다.

정돈된 학교 건물 뒷마당으로 들어서자 작지만 오밀조밀 가꾸어 놓은 정원이 보였다. 이곳에서는 일 년에 한 번씩 작은 음악회가 열린다. 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시민들까지 모인 자리에서 이젠 세계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많은 수상경력과 실력을 인정받은 관악부의 연주가 울려 퍼지는 것이다. 초록의 나무와 꽃들 그 사이에 푸른 청소년들이 울리는 아름다운 소리의 향연이 아직 이른 봄이지만 들리는 듯하다.

▲ 2005년 3월 19일 최상하 영일고등학교장
ⓒ 안성용
최상하 교장은 처음부터 교직 생활을 해온 사람은 아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어려웠던 시절, 서울서 어렵게 다니던 대학공부를 중단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그는 스물 서넛 나이에 사업을 시작했다.

없는 자본에 섣불리 시작할 사업이 그리 흔하였겠는가. 그는 죽도시장에서 멸치와 오징어 등을 다루는 건어물상을 시작했다. 그가 남과 달랐던 것은 반드시 일어서리라는 단단한 각오와 도중에 포기하지 않아야겠다는 굳은 의지였다.

“그 때 저는 제 자신과 한 약속이 있었습니다. 바로 ‘남들 잘 때 나는 일한다. 남들 쉴 때 나는 일한다’였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이겨낼 방법이 없었지요. 부지런한 것만큼 정직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살다보니 자연스레 함께 시작했던 사람들보다 돈도 많이 벌 수 있었고 빨리 일어설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저 물건을 파는 일에서 시작한 사업은 직접 가공하는 일까지 벌이게 되었고 그는 자신이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기반이 잡혔을 때 그는 교육사업을 꿈꾸었다. 후손들을 교육하는 것만큼 바르고 정직한 사업이 없을 거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1978년 11월 8일 영일종합고등학교 설립 인가를 받았다. 이사장으로 있으면서도 처음엔 직접 참여하지 않고 열심히 일해서 얻은 것들을 모두 학교에 지원하였다.

그때만 해도 도시 외곽에 자리 잡은 학교는 열악한 주변 여건을 벗어날 길이 없었다. 뭔가 바꾸어야겠다는 생각에 그는 직접 학교 운영에 참여할 생각을 하게 되었고 늦은 나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대학공부를 시작했다.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면 늦은 나이에다 일하면서 공부를 한다는 게 쉽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 시절이 참 좋았습니다. 나이 어린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세대 차이를 극복할 수 있었고 아이들 마음이 어떠한가를 알게 되었으니 오히려 몇 갑절의 공부를 할 수 있었던 좋은 시절이었던 셈이지요.”

그리고는 1987년 영일고등학교로 교명을 변경, 다음해 교장으로 취임을 하였다. 막상 와보니 시내 학생들에 비해 가정환경도 학생들 자신의 의욕도 뒤지는 게 현실이었다. 어떻게 하면 즐겁고 신나는 학교 분위기를 만들어 아이들의 사기를 올려놓을까를 고민하다 얻은 생각이 음악이었다.

어찌 보면 무모한 결정이었을 수도 있으나 그는 서둘러 악기를 구입하고 관악부를 조직하였다. 교정에서는 처음으로 악기소리가 들리고 학교는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막연히 음악을 가르치는 것에서 벗어나 각종 대회에 출전시켜 폭넓은 견문을 쌓게 하였다. 좋은 지도 선생님을 만난 아이들은 흥에 겨워 열심히 연습했고 이름은 나날이 외부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결과 지금 영일고등학교의 관악부는 전국적으로 실력을 인정받게 되었고 수상경력이나 실력만으로 당당히 대학에 진학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저마다 갇혀진 교실에서 똑같은 공부를 하는 것에 시들시들해 졌던 아이들의 모습은 파릇파릇 살아나기 시작했다. 이에 힘을 얻은 그는 마음껏 산을 오르는 산악부, 그리고 서예, 문학, 미술 등 다양한 종류의 문화 예술을 현장에서 활동하는 유능한 전문 강사들을 초빙하여 정기적으로 세심히 지도하였다. 이러한 경험들이 훗날 아이들에게 정서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리라는 확신에서였다.

그뿐 아니라 전교생을 대상으로 ‘1인 1악기 다루기’를 시작, 남학생에게는 색소폰을 여학생에게는 플루트를 가르치고 있다. 물론 악기는 모두 학교에서 구입한 것이라 학생들은 마음껏 악기를 연주할 수 있다.

일반 고등학교의 학생들은 꿈도 꾸지 못할 여유로움 속에 아이들을 방목하는 최상하 교장은 ‘에이블’이라는 댄싱 팀도 구성, 한창 자라는 아이들의 감성을 마음껏 발산하게 하였다. 그것 역시 각종 전국대회에 나가 수상을 하고 이런저런 축제에 초청 받아 공연을 펼치기도 하는 등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 2005년 3월 19일 학생들과의 즐거운 한 때
ⓒ 안성용
“남들이 보면 고등학생들이 공부는 안하고 춤이나 춘다고 할지 모르지만, 춤을 추면서 아이들은 오히려 공부도 더 열심히 하던걸요. 꿈이 생겼으니 공부가 저절로 하고 싶어지는 것 같아요. 저도 가끔 아이들을 따라 공연을 보러 갑니다. 지난번엔 여의도에서 경연대회가 열렸는데 아 글쎄 그 넓은 광장에서 실력을 뽐내는 모습이 얼마나 예쁜지 제 마음이 다 신이 납디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발굴해 지원하는 학교를 아이들은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자신이 몰랐던 자신의 능력을 조금씩 발견하며 자꾸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학교는 세상에 자신감이 생긴 아이들에게 자신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 준다.

최상하 교장은 주기적으로 치매 노인들이 계신 햇빛마을, 정예원등 사회복지 시설로 아이들을 안내하고 그들은 그곳에서 세상을 보는 눈을 만나는 것이다. 제 몸으로 부딪쳐 봉사하고 돌아와서 스스로 느끼는 공부야말로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큰 재산이 되기 때문이다.

교장실엔 최상하 교장이 쓴 글씨들이 걸려 있다. 올해로 10년이 되었다는 그의 글씨는 힘이 있고 바르다. 그 뿐 아니라 그는 색소폰 연주도 즐긴다. 아이들의 연습실로 가서 함께 열심히 배우고 익힌 솜씨가 멋지다. 일흔이 넘는 나이에도 자신을 끊임없이 아이들과 동선상에 올려놓고 살아간다. 그것이 아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가장 큰 그 만의 비법이 아닐까.

올해엔 서울에 있는 대학에 120명이나 진학하는 결과를 얻었다. 지금은 시내에 있는 학생들도 이 학교에 진학하고 싶어 할 정도로 즐겁고 신나게 공부하는 학교가 되었다. 이것은 때 묻지 않은 아이들과 성실히 지도하는 선생님들, 그리고 학교를 믿는 학부모와 늘 아이들 편에 선 최상하 교장이 함께 이루어 낸 결과이다.

“아마 제가 젊어서부터 교직 생활에 몸담았더라면 이러한 것을 생각해 내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어렵게 세상 공부를 먼저 했던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된 것이지요. 고등학교 공부는 3년이지만 아이들은 이곳에서 앞으로 30년 아니 평생을 살아 갈 힘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세상에 나가서도 지금처럼 즐겁고 신나게 인생을 개척해 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덧붙이는 글 | 푸른 바다, 푸른 꿈, 그리고 푸른 사람들이 사는 포항. 오마이뉴스 팀은 아름다운 포항 사람들을 취재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새벽을 열고, 뜨거운 태양을 지나고, 다시 하루를 닫는 사람들. 그들의 힘으로 존재하는 포항의 미래를 계속해서 찾아갈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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