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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애(고 서미남 아내)씨와 서명철(고 서미남 자녀)씨는 1971년 7월 납북되었다가 다음해인 1972년 9월 7일 귀환한 탁성호 선원 고 서미남씨의 가족이다. 아내 김봉애씨는 청력이 좋지 않아 인터뷰 내내 큰소리로 말을 전해야 했다. 그래도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에는 아들 서명철씨 부부가 대신 말을 전해주기도 하면서 대화했다.

탁성호 선원이었던 고 서미남씨는 여수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안도라는 섬의 선원이었다. 여느 섬 사람들처럼 서씨 역시 어린 나이에 뱃일을 시작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한 뒤에도 서씨의 뱃일은 계속되었다.
 
남편이 근해에서 배를 타며 일하다가 풍선(風船, 돛을 이용하여 바람의 힘으로 이동하는 배)을 하나 장만해서 배를 직접 몰았어요. 그때 물고기를 제법 잘 잡아서 돈을 좀 모았죠. 그런데 친척들 간의 문제 때문에 결국 그 배를 팔아버리고 남편은 오징어 배를 탔어요. 그 배가 탁성호였어요. 오징어 배는 탁성호가 처음이었는데 그리(납북) 되어 버린 거죠.

당시 탁성호에는 안도 섬사람들 5명이 함께 승선했다고 한다. 탁성호가 납북될 때 안도 사람 5명 모두 함께 납북된 것이다. 탁성호가 납북되었다는 소식은 여수 남산동에 살던 선주로부터 전해 들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순간이었다고 한다. 그런 마음도 모르는지 마을 한쪽에서는 다른 선박을 타고 출항했다 만선으로 돌아온 선원들의 춤판이 벌어졌다고 한다.
 
탁성호가 나갈 때 안도 사람 2명이 다른 오징어 배를 타고 나갔어요. 그런데 탁성호만 납북되고, 그 두 사람이 탄 배는 오징어를 잔뜩 잡아서 만선이 되어서 돌아온 거예요. 항구에 들어오자마자 만선이라며 동네를 돌며 춤을 추는데 부아가 안 치밀어 오르겠어요. 우리 남편은 납북되어 가지고 죽었나 살았나도 모르는데 남 속도 모르는지 만선되었다고 춤을 추고 동네를 돌아다니니 화가 안 나겠어요.

남편 서씨가 납북된 뒤 아내 김씨는 매일 같이 라디오를 귀에 대고 살다시피 했다고 한다. 당시 남편의 생사나 귀환을 알기 위해서는 오로지 라디오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생계는 남편이 납북되기 전 모아둔 생활비로 근근이 이어갈 수 있어서 아이를 돌봐야 했던 김씨는 다른 가족처럼 큰 어려움은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1년여를 지내던 어느 날 남편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루는 동네 아주머니 한 분이 라디오를 듣다가 동네를 막 뛰어다니면서 '아이고 배(탁성호)가 넘어왔단다. 명호(아들 이름)네야, 아범들이 다 돌아왔단다'하며 춤을 추는 거예요. 그래서 탁성호가 돌아오는 줄 알았죠.

그러나 실제 남편 얼굴을 보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탁성호가 북한에서 귀환한 뒤 먼저 속초경찰서에서 일주일가량 조사를 받고 난 뒤 여수경찰서로 인계되었기 때문이다. 탁성호 선원들은 속초나 고성의 선박들과는 달리 속초에서 1차 조사를 받은 뒤 또다시 선박 등록지인 여수에서 조사를 받았다.

아내 김씨가 여수에 도착한 남편을 처음 본 것은 여수 신항 근처의 어느 건물이었다. 여수경찰서 수사관들은 그곳에 탁성호 선원을 모두 가둬놓고 10여 일가량 조사했다고 한다. 남편이 갇혀 있던 건물에 갈아입을 옷과 음식을 챙겨 면회 간 김씨는 형편없이 망가진 남편의 얼굴을 보고 너무도 속상했다고 한다.
 
여수로 막 넘어와서는 여수 신항에 있는 어떤 건물에 10일 정도 선원들을 가둬놓고 딱 하루 가족들을 만나게 해주더라고요. 얼굴을 보니 납북되기 전보다 형편없이 되었더라고요. 그러고 나서 순천교도소로 넘어갈 때 잠깐 보여줬어요. 그런데 만날 때마다 '수사관들한테 맞았다' 소리는 하지 못하고 '고통이 세다'는 말을 그렇게 하더라고요. 맞았다는 말을 못 할 정도로 겁에 질려 있었어요.

재판이 끝나고 집행유예로 풀려나기까지 3개월가량 교도소에 갇혀있던 남편 서씨는 출소 후 한동안 배를 타지 못하고 고문으로 아픈 몸을 추슬러야 했다. 허리, 다리 등에 고통을 호소해 한약을 달여주고 염소를 잡아서 탕을 내기도 했다.

경찰은 그렇게 시체처럼 누워있는 남편을 그냥 놔두지 않았다. 매일 집주변을 감시하는 것은 물론이고 야간에도 집 근처를 배회했다. 집 주변 도랑을 살피고 행동 하나하나를 감시했다. 마치 사복을 입은 저승사자 같았다.
 
 납북 어부들은 간첩 조작의 단골 대상이었다. 사진은 북한에 억류되었다가 인천항에 귀환한 어선 제37, 38 태양호 어부들. 1989.2.12
납북 어부들은 간첩 조작의 단골 대상이었다. 사진은 북한에 억류되었다가 인천항에 귀환한 어선 제37, 38 태양호 어부들. 1989.2.12 ⓒ 연합뉴스
 
사라진 시동생, 끌려간 가족

그러나 정작 서씨 가족을 더욱 괴롭게 한 것은 공안기관의 이유 없는 의심이었다고 한다. 공안 사건이 발생하기라도 하면 이유 없이, 소리소문없이 잡혀가 조사받고 와야 했다고 한다.
 
한 번은 우리가 섬을 떠나 여수로 나와 살았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살던 집에 시동생 가족이 들어와 살았어요. 그런데 비가 많이 오던 어느 날 비설거지한다고 나간 시동생이 사라진 거예요. 시동생 각시가 사람이 없어졌다며 신고했더니 경찰, 예비군들이 다 나와서 시동생을 찾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 일로 우리 가족이 아주 고통을 당해야 했어요.

여수경찰서는 시동생의 실족을 대공 사건으로 의심했던 것이다. 북에서 지령을 받고 내려온 서씨를 대신해 서씨 집에 살고 있던 시동생을 서씨로 착각해 북으로 데려가지 않았겠느냐는 의심이었다. 그 일로 시동생 아내와 서씨, 서씨 아내가 여수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여수경찰서에서 시동생 각시가 조사를 받는데 무릎 사이에 각목을 끼우고 남자들이 허벅지에 올라타더래요. 그리고 각시를 그렇게 때리더랍니다. 나중에 각시 몸을 보니까 온몸이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더라고요. 남편도 그렇게 고문을 당했어요. 나도 데리고 가서 조사를 하는데 수사관들이 무조건 다 불라는 거예요. 나는 악을 쓰고 덤비면서 '뭘 자꾸 불라는 거냐. 사람 풀어주라'고 악을 쓰고 덤볐어요. 그렇게 10일 가둬놓고 고문을 하더라고요.

그런데 이들의 누명은 엉뚱한 곳에서 풀렸다. 시동생의 행방을 알아야만 서씨 가족이 풀려날 수 있다는 생각에 서씨 부모님 등이 유명한 무당을 찾아간 것이다. 무당의 말로는 '도깨비가 시동생을 데리고 바다로 들어갔다'라며 안도 근처 바닷속을 찾아보라고 말해주었고, 무당이 알려준 대로 잠수부를 동원해 바닷속을 들어가 보니 거짓말처럼 그곳에 시동생의 시신이 바위 사이에 끼어 있었다고 한다.

여수경찰서 직원들이 출동해 시동생의 시신을 확인하고서야 서씨 가족은 풀려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뒤로도 나쁜 일이 있으면 남편을 데리고 가고, 또 형사들이 찾아오기도 했어요.  술집에서 술을 먹어도 뒷조사를 해요. 가끔 안도 사람들이 이북 갔다 온 이야기를 좀 해보라고 하면 '니들이 나를 죽이려고 하냐'며 남편이 펄쩍 뛰었어요. 내가 억울한 이야기를 좀 해보라고 하면 '통일이나 되면 말해준다'면서 죽을 때까지 입을 닫고 살았어요. 얼마나 무섭고 억울하면 그랬겠어요. 제발 남편의 억울함을 풀어주면 좋겠어요.

#평화박물관#FIGHTING CH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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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가는 세상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변화시켜 나가기 위해서 활동합니다. 억울한 이들을 돕기 위해 활동하는 'Fighting chance'라고 하는 공익법률지원센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문두드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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