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pixabay
커피는 어땠을까. 일찍이 커피 대체품을 발견하여 널리 활용한 경험이 있던 나라는 프로이센, 지금의 독일이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커피 과음이 가져올 건강상의 문제, 커피로 인한 노동자들의 과소비, 커피 수입으로 인한 외화 낭비, 커피 소비의 폭발로 인한 맥주 소비의 감소 등을 염려하였다. 그는 커피에 높은 세금을 부과하는 것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지만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커피 밀수입과 밀거래에 따른 가격 상승만 초래하였고, 간접적으로 커피 대용품 시장을 활성화시켰을 뿐이다. 커피를 대신할 수 있는 것으로 밀·보리·무화과·옥수수, 그리고 치커리 등이 등장하였다. 중국 송나라 시절 고급차 재료값이 치솟자 처음에는 저급한 차를 섞었고, 이어서 감나무 잎이나 감람나무 잎 같은 이물질을 섞어 팔았던 것과 다르지 않다.
많은 커피 대용품 중에서 치커리가 가장 성공적이었다. 커피 역사학자 야콥의 표현대로 나폴레옹은 치커리와 동맹을 체결하였다. 적대국이었던 프로이센에서 성공을 거두었던 치커리를 커피 대용품으로 지지하였다. 물론 커피 대체품으로 치커리를 사용하는 것은 사탕무보다는 덜 성공적이었지만 불가피한 일이었다. 치커리 뿌리를 말려서 가루를 만들고, 이것을 우려서 만드는 음료의 맛과 향이 커피를 따라갈 수는 없었지만, 영국을 이기기 위해 기꺼이 마셔야 했다.
마지못해 마시던 치커리가 프랑스인들의 입맛을 길들인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대륙봉쇄령 해제 이후에도 프랑스인들 사이에 치커리 커피 혹은 치커리를 섞은 커피를 찾는 습관이 지속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19세기 전반 유럽인의 일상을 담은 그림들 속에서 목격하는 커피잔을 든 파리지엔느들의 잔에 담겨 있는 것은 대부분 향기 나는 커피가 아니라 쓴 치커리 커피였다.
다시 찾아온 진짜 커피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는 실패로 끝났다. 대륙봉쇄령에 지친 스웨덴, 포르투갈, 러시아 등이 반기를 들거나 프랑스의 군대 동원 요청을 거부하였다. 스웨덴에 대한 보복 공격에 참여하라는 요청을 거부한 러시아를 응징하고자 1812년 겨울에 군대를 이끌고 출정한 나폴레옹은 추위와의 싸움에서 결국 지고 말았다.
러시아와의 전쟁 이전에도 이미 대륙봉쇄령은 여기저기서 흔들리는 증상 혹은 부작용을 노출하고 있었다. 밀수입과 암거래로 인한 시장질서의 붕괴가 대표적이었다. 커피와 설탕 등 아열대 작물을 제외한 곡물이 풍부한 프랑스와 산업혁명의 결과물인 각종 공산품이 풍부한 영국 사이에 밀수입이 열리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수출이 막힌 영국에서는 물품 가격이 폭락하고, 수입을 못하는 대륙에서는 물품 가격이 폭등하는 기현상이 초래되었다.
영국 전체의 커피 소비량은 연 100만 파운드 정도였는데 재고는 그 1000배에 달하였다. 18세기 중반부터 커피 대신 차를 마시는 문화에 빠져 있었던 영국인들 앞에는 커피 재고가 나날이 쌓여 갔고, 2000개가 넘는 카페에 시민들이 넘치던 파리 시내에는 커피 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1813년 즈음에 런던에서 40실링 정도 하는 커피가 함부르크에서는 500실링에 거래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프랑스의 약점을 눈치챈 영국이 도리어 대륙과의 무역을 금지하고 밀무역을 단속하면서 생긴 일이었다. 영국의 프랑스 봉쇄로 인해 프랑스와의 무역에 방해를 받아 피해를 본 미국이 1812년에는 영국에 선전 포고를 하여 전쟁을 시작하였고, 2년 이상 지속된 이 전쟁으로 영국의 피해 또한 적지 않았다.
1813년부터 시작된 반 나폴레옹 동맹국들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나폴레옹은 결국 1814년 4월에 퇴위당하여 지중해의 엘바섬으로 추방되었다. 그를 이어 즉위한 루이 18세에 의해 1814년 4월 23일에 대륙봉쇄령은 폐지되었다. 커피 거래가 다시 활기를 찾았고, 진짜 커피가 유럽인들의 일상을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나폴레옹이 지배하던 시대, 특히 대륙봉쇄령으로 고통받던 19세기 초 유럽인들의 희망 중 하나가 '진짜 커피를 마시는 것'이었다는 것은 사실에 가깝다. 그러나 커피가 나폴레옹에 대한 프랑스와 유럽인들의 불만을 초래하였고, 이로 인해 나폴레옹 체제가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는 해석은 과장된 측면이 있다.
당시 유럽 시민 사회에서 커피가 차지하는 위상이 그 정도로 높지는 않았고, 유럽 정치에서 나폴레옹이 차지하고 있던 영향력도 커피에 의해 무너질 정도로 취약하지는 않았다. 커피는 나폴레옹의 인기를 약화시킨 수없이 많은 요인 중의 하나였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의 몰락을 가져온 결정적 요인은 아니었다.
치커리로 만든 가짜 커피에 익숙하던 프랑스인들은 진짜 커피가 넘치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커피에 우유를 듬뿍 넣기 시작하였다. 카페오레가 탄생한 것이다. 프랑스 문화가 강하게 남아 있는 미국 뉴올리언스 지역에서는 지금도 치커리 뿌리를 넣어 만든 커피에 뜨거운 우유를 듬뿍 넣은 프랑스식 카페오레가 인기를 끌고 있다. 치커리도 우유도 커피에 넣는 이물질이기는 마찬가지이고, 성공한 가짜 커피의 대명사인 치커리 커피와 카페오레 모두 나폴레옹이 다스리던 프랑스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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