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타임스> 10월 21일자 보도. "Konglish is not your bepu:South Korea fights corruption of its language"
더 타임스 캡처
기자는 "외래어를 많이 사용할수록 한국어의 사용은 줄어들"며 "이런 경향이 이어지면 심각한 문화적 위기를 초래할 것"이라는 국내의 우려를 소개하면서, 하지만 외래어의 영향은 피할 수 없는 현상이라는 언어학계의 목소리도 함께 소개했다. 한국어로 유입되는 많은 외래어들과 함께 최근에는 반대로 한국어에서 유래한 다양한 말들이 영어사전에 등재되고 있다고 기자는 소개한다. 실제 올해의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는 피시방, 오빠, 먹방 등 한국어에서 유래한 26개의 신조어들이 등재되기도 했다.
인류가 사용하는 거의 모든 언어는 다른 언어들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어휘와 표현법들을 발달시켜왔다. 발음 역시 타 언어의 영향을 받아 변화를 겪는 것이 필연적이다.
국내 일각에서 한국어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하는 현대 영어도 사실은 어마어마한 외래어를 수용한 결과물이다. 11세기 브리튼 섬에 상륙한 노르망디 왕조가 정권을 장악한 이후 엄청난 규모의 프랑스어 단어가 영어로 유입됐다. 그 결과 현대 영어 어휘 가운데 최소 3분의 1, 많게는 3분의 2가 프랑스어를 차용한 단어에 해당한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문화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21세기 영어도 이처럼 '순수 혈통' 출신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주변 언어들과의 열린 소통 과정을 통해 면역력을 키워온 결과물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영어다.
현대에 와서는 거꾸로 수많은 영어 단어들이 프랑스어로 유입된다. 프랑스어를 향한 영어 쓰나미 현상에 대해 프랑스어 어휘 연구의 대가 알랭 레이(Alain Rey)는 "우리의 언어가 빈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라고 단언한다.
일간지 <르피가로>와 한 인터뷰에서 그는 언어 변질의 우려에 대해 "모든 시대 사람들이 그렇게 느꼈다"면서 프랑스어로 영어 단어들이 유입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한다. 다만 우려할 것은 유입되는 외래어가 자국어 어휘군 속에 추가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 단어를 대체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프랑스어로 "전화할 데가 있어"를 "J'ai un appel"(제 앙 나펠)이라고 하지만 최근의 프랑스인들은 "J'ai un call"(제 앙 콜)이라고도 한다. "통화"를 말하기 위해 프랑스어 "appel" 대신 영어 "call"을 쓰는 것인데 두 표현의 뉘앙스는 다르다.
전자는 친구나 부모 등 개인적 전화통화를 의미하지만 후자는 업무상 필요한 전화통화를 뜻한다. 따라서 첫 번째보다 두 번째로 말할 때 더 '중요한 전화'라는 뉘앙스를 담고 있다. 결국 현대 프랑스인들에게 "call"은 단지 영어의 한 단어일 뿐 아니라 새 의미를 담은 프랑스어 단어가 된다.
한국어에서 '모임'과 '미팅'의 차이가 이와 유사한 예에 해당한다. 직장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미팅'을 '모임'으로 고쳐 써야 한다는 지적도 있지만, 뉘앙스의 차이는 분명 있다. "오늘 오후 모임이 하나 있어"와 "오늘 오후 미팅이 하나 있어"는 직장인들에게 분명 다른 용도로 쓰인다.
특정 맥락에서 쓰이는 영어의 특정 단어가 한국에서는 토착어화 됐지만 프랑스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사회망에서 상대방의 글이나 사진에 동의나 호감을 표할 때 쓰는 영어 "like"는 한국어에서 "좋아요"로 정착됐다. 반면 프랑스에서는 그에 해당하는 "aimer"(에메)라는 동사가 있지만 영어에서 변형된 "liker"(라이케)를 사용한다.
특정 단어가 두 언어체계를 왕래하면서 영향을 주고받는 경우도 많다. 오늘날 대부분의 프랑스인들은 "challenge(도전)"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영어에서 온 외래어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 단어는 과거 프랑스에서 사용되다 14세기에 영어로 유입된 경우다. 이후 프랑스에서 쓰이지 않다 최근 다시 영어에서 유입됐다. 영어식 발음으로.
언어는 이처럼 정책자의 결정이 아니라 사용자의 필요에 의해 유입되기도, 변화하기도, 소멸하기도 한다. 다수의 사용자가 받아들이면 그 문명의 언어가 되고, 역시 다수의 사용자가 배척하면 소멸하기도 한다. 언어는 인위적인 정책 결정으로 도입할 수도, 바꿀 수도, 없앨 수도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