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자료사진
그러나 공판은 형식적인 절차대로 진행되었을 뿐 누구도 피고인들에게 '얼굴이 왜 그런가, 손은 왜 다쳤는가' 등을 묻지 않았고, 공판조서에 그런 내용도 기재되지 않았다. 반면 딸 한혜정씨의 기억 속에 아버지 한삼택씨는 고문으로 인하여 손·발톱이 모두 까매졌고 머리가 하얗게 세었다.
"잡혀가신 가을이 지나고 이듬해 봄에 아버지가 돌아오셨는데 초췌하고 얼굴에 핏기가 없이 말라있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겨울만 되면 아버지께 매일 따뜻한 물을 떠다드렸습니다. 아버지가 양말을 벗고 대야에 발을 담그시는데 발을 보면 발가락이 다 새까맣게 된 거예요. '왜 이러냐'고 여쭤보니까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돌아오시고 나서 아버지의 머리가 새하얗게 되었습니다. 제가 한 달에 한두 번씩 염색을 해드린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아버지 나이가 당시에 40세 정도였습니다. 겨울만 되면 아버지의 손·발톱이 새카맣게 변하고 발등 아래가 까맣게 되었어요. 그리고 연행되기 전에는 그러지 않으셨는데 돌아오신 후에는 코가 항상 막혀서 괴로워하셨어요. 아버지는 결국 젊은 나이에 부비동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한혜정씨 외에 한삼택씨의 조카인 강동우씨도 연행 후 한삼택씨가 고문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서울에서 모진 고문을 많이 당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서울에서 돌아온 후부터 날씨가 추우면 몸 여기저기가 아파 술을 많이 드시고, 겨우 일자리를 얻어 근무하다가 직장에서 쫓겨나거나 하는 경우가 많아지니 경제적으로 많이 곤경에 처했습니다."
함께 기소된 공동피고인 교장 이**도 자신의 항소이유서 및 상고이유서에서 전기고문 등을 수일동안 당하였음을 구체적으로 기재했다.
변호인도 침묵
재판과정에서 위법한 구금이나 수사관들의 가혹행위에 대한 진술이 전혀 나오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항소심 기록 중 피고인신문과정에서 구체적인 불법구금에 대한 진술이 나왔다.
변호인 하경철은 피고인(교장선생님)에게
문 - 진술한 재일본 조선은행 대판신용조합의 이사인 김**과 재일본 조선인 대판상 공회 부사장인 한** 등이 조총련계통 사람들이라는 것을 언제 알았나요?
답 - 1970.9.27. 아스트리아 호텔에서 알았습니다.
문 - 어떻게 하여 동인 등이 조총련계통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나요?
답 - 수사관에 의하여 아스트라호텔에 끌려가서 고**과 수사관들이 말을 해서 비로소 알았습니다.
문 - 그 이전에는 몰랐나요?
답 - 몰랐습니다.
문 - 1970.9.27. 아스트리아호텔에는 어떻게 하여 갔나요?
답 - 경찰관이 연행하여 갔습니다
문 - 일명 고박사(전에 가짜 박사 소동의 주동인물)인 고**이 그 당시 수사기관이 아니면서도 그 호텔에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답 -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항소심 1차 공판조서(1971. 6. 3)
한삼택씨와 공범의 혐의로 함께 기소된 교장 이**은 공판정에서 '아스트리아 호텔에 수사관들에 의해 끌려갔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재일동포들이) 조총련계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변호인은 그 호텔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피고인에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곳에 왜 끌려갔는지, 혹시 진술에 강압이 있었거나 고문이 있었는지, 왜 호텔에 피의자를 영장도 없이 연행해 갔는지 묻지 않았다. 판사도 검사도 묻지 않았다. 피고인 한삼택씨와 이**씨의 변호인들이 제출한 의견서에도 불법구금과 가혹행위에 대한 언급은 없다.
교장 이**의 공판정에서의 증언 그리고 본인이 작성한 항소 및 상고이유서 외에 이 사건의 수사기록과 공판기록에서 피고인들의 구금과정과 고문에 대한 내용은 없다. 법률전문가인 수사관, 검사, 변호인, 재판부의 기록에서 찾을 수 없는 이야기는 당사자의 진술서 그리고 가족들의 기억 속에만 있다.
증거도 없는데 '범죄사실 인정하기에 넉넉하다'
수사기록상 재일동포들이 반국가단체 소속인지 이들이 간부인지 입증할 증거는 없었다. 검사는 재판과정에서 김녕 출신 주민을 증인으로 신청해 김녕중학교 관사 신축 자금 기부자들이 조총련계라는 진술을 받고자 하였다. 증인은 김녕중학교 기성회 소속이라는 점 외에 특별히 교장 관사 신축자금 기부자들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1971년 7월 3일 열린 제3회 항소심 증인신문기일에 증인으로 출석해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문 - 김**과 한**이 조총련계 사람이라는 것을 증인이 언제부터 알았나요?
답 - 위 양인이 조총련계라는 풍문이었던 연월일은 확실하지 아니하나, 4, 5년 전에 들었고 (중략)
문 - 1964. 동경에서 개최하는 올림픽 때에 다녀온 사람들로부터 위 양인이 조총련계 사람들이라는 말이 있었나요?
답 - 그런 풍문이 있었습니다.
1971. 7. 3. 항소심 제3회 공판기일 증인신문 중
검사는 증인에게 반복하여 '교장 관사 신축자금 기부자들은 조총련계 사람인가?' 질문하였고 증인은 '그런 풍문이 있었다'고 답변했다. 법정에서의 진술은 자신이 직접 경험한 사실일 때 증거능력이 있고, 만약 다른 사람에게 들었다고 진술한다면 보통 '누가 언제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하였는지'를 한 번 더 질문하는 것이 통상적이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는 풍문에 대하여 더 이상 묻지 않고 신문을 마무리했다.
피고인들의 변호인들은 교장 관사 신축 자금 기부자들의 소속을 확인하려고 외무부와 주일대사관에 사실조회를 신청했다. 그런데 해당 사실조회에 대한 첫 번째 회신은 외무부나 주일대사관이 아니라 중앙정보부가 작성했다.
1971년 1월 21일 자로 작성된 중앙정보부의 회신문서에 따르면 김**의 국적은 조선(해방 전 조선적), 중화요리점을 경영하고 있으며 '조총련계인 조선인 상공회 대판(오사카)부 본부 부회장, 조총련계인 조은대판 신용조합 이사'라고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인 상공회가 왜 조총련계로 분류되는지, 조은대판 신용조합이 왜 조총련계인지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는 없다. 중앙정보부원이 작성하였다는 해당 문서는 누가 작성하였는지 작성자의 성명이 없다.
또 다른 재일동포 기부자 한**은 인쇄주식회사를 경영하고 있는데 '조총련계인 조선인 상공회 대판(오사카)본부 부회장을 역임'이라고 기재되어 있으며 동시에 재일 대한민국 거류민단의 단원으로 국민등록을 필하였다고 기재되어 있다. 민단이란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의 줄임말로 한국정부의 지원을 받던 단체이다. 민단은 1970년 당시를 기준으로 수사기관이나 재판부가 소위 '반국가단체'로 보지 않던 단체이다.
1971년 2월 3일 외무부는 법원의 사실조회에 대한 회신문서를 제출하였는데 중앙정보부의 기재내용과 달리 재일동포 기부자들 모두 민단 단원이라고 회신하였다. 위 두 가지 사실조회의 회신 문서에 따르더라도 교장관사 신축 자금 기부자들이 조총련 소속의 간부라는 점이 명확하게 입증되었다고 보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