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바이러스 창궐 이후로도 마을 사람들의 일상은 큰 변화 없이 이어졌다.
림수진
두 번째 이유였던 마을 출입의 불편함은 3월 중순경부터 시작되었다. 마을을 들고 나는 길목에 바리케이드가 쳐지고, 개인 화기로 무장한 대여섯 명의 장정들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가 담긴 소독 통을 든 채 오고 가는 차량을 세우고 심문을 시작했다. 그들의 소속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묻지 않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분명한 것은 주 정부나 기관 소속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마을을 들고 날 때마다 심문을 받아야 했다. 그들에겐 언제라도 마을 출입을 금지시킬 수 있는 힘이 있어 보였다. 마을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지 못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겠으나 혹 마을을 나갔다가 마을로 들어오지 못하는 상황은 내게 큰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학과장은 흔쾌히 내게 3월 16일 이후 남은 이틀 간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러던 와중 그 날 오후 상황이 조금 더 긴박했던지 주 정부 명령보다 이틀이나 앞서 학교 차원에서 모든 활동 중지와 소개령을 내렸다. 각자 안전한 곳에 흩어져 코로나바이러스를 잘 피하라는 안내 뿐, 이후 수업이나 행정 업무 지속에 대한 안내는 전혀 없었다. 그렇게 예기치 못한 채 학기가 중단되었다.
4월로 접어들면서 멕시코와 한국 간 항공기 운항이 잠정 중단되었고 양국 간 우체국 국제우편 서비스도 사라졌다. 멕시코 주요 대도시에 살고 있는 한국 교민들 사이에서는 전세기를 띄우겠다는 이야기가 들려왔지만 나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설령 전세기가 뜬다 한들 내가 사는 C읍으로부터 약 1000km나 떨어진 수도 멕시코시티까지 갈 수 있는 방법이 여의치 않았다. 물론 당장 가야 할 이유도 없었다. 어디든 있는 그 곳에 납작 엎드려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할 것 같았다.
납작 엎드리다
4월 중순경 셧다운에 들어갔지만, 우려되었던 사재기는 없었다. 특히 내가 사는 C읍에서는 오히려 가게에 물건이 잔뜩 쌓여 흘러넘칠 정도였다. 사재기도 결국은 돈 있는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지, 당장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부활절이 가까워질 무렵, 근처 대도시로 나가서 일을 하던 마을 사람들이 당장 하루 벌이 할 곳을 잃게 되면서 밥 굶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읍사무소 복지부가 나서서 기초 생필품을 지급했지만, 언 발에 오줌 누는 수준이었다. 마침 그 때 선물 상자들이 쏟아져 내려왔으니, 이미 여러 해 전 마을을 장악한 마약 카르텔 조직으로부터 당도한 물건들이었다. 우리 마을은 멕시코 최대 카르텔 조직이라 할 수 있는 '할리스코 신세대 카르텔'의 영향 하에 있었고 선물 상자에도 그들의 문장이 굵직굵직하게 새겨져 있었다.
다시 수업이 재개된 것은 6월이었다. 물론 비대면 수업이었다. 학교에서 수업 개시와 관련하여 강조한 유일한 것은 '유연성'이었다. 절대 기준을 정하지 말고 최대한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고 또한 학생들에게 수업과 관련하여 스트레스를 주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 이면엔 최대한 간단하게 이번 학기를 마무리 지으라는 메시지가 읽혔다.
학생들 일부는 인터넷은커녕 이동전화 신호도 잡히지 않는 곳에 머물고 있었다. 이메일부터 SNS 매체들 그리고 때로는 유선 전화를 이용해 각각의 학생들 상황에 맞게 수업이 이루어졌지만, 그 어떤 학생들도 이에 대한 불만은 없었다. 서로가 처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임을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