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 당시 학살 모습을 찍은 사진.
오문수
일제강점기에 '지까다비'라 불린 운동화를 신은 김형용은 지친 몸을 이끌고 읍내를 걸었다. 하루 종일 읍내 뒷산을 오르락내리락 했기 때문이다. 여유 있는 사람들이 하는 등산이라면 운동도 되고, 땀을 흠뻑 흘려 스트레스 해소에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럴 형편이 못되었다. 몰래 나무를 베는 이들을 감시하는 일이 직업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산감(山監)'이다.
석탄과 석유가 난방연료로 실용화되기 전까지, 서민들은 마을 주변의 산에서 땔감을 구해야 했다. 그래야 한겨울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산은 국유림이거나 사유림이었다. 그렇기에 주인이 없는 산은 없었다.
땅 임자가 아닌 이가 산에서 나무를 하는 것은 불법행위였다. 커다란 나무를 자르는 것만이 아니라 잔가지를 부러뜨리거나 낙엽을 줍는 행위도 안 된다. 이런 불법 행위를 감시하는 사람이 바로 산감이다. 생존을 위해 산에서 땔감을 구하려는 청년은 말할 것도 없고, 여성, 어린이까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당시 경찰이 호랑이만큼 무서웠다면, 산감은 경찰보다 무서운 존재였다.
김형용(1922년생)은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학업을 하고, 여순사건 당시에는 광양군청에서 공무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구체적 업무는 산감이었다. 찬바람이 심하게 불던 1949년 11월 그는 삭신이 노곤할 정도로 산을 오르락내리락 했다.
운동화 신었다고 '봉기군 협조자'
김형용은 온 몸이 부서질 것 같아 다른 생각 없이 집을 향해 부지런히 걸었다. 그런데 뒤에서 누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이! 거기 서봣." 뒤를 돌아보니 군인과 경찰들이었다. 죄 지은 것도 없는데 김형용은 몸이 움츠러들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들은 김형용의 아래 위를 쳐다보더니 그의 신발에 주목했다. 산을 타느라 운동화에 흙이 묻은 것이 문제였다. "잠깐 경찰서로 갑시다." "무슨 일이오? 나는 공무원이에요. 산감이란 말이요." "시끄러워, 자식아! 왜 이렇게 잔말이 많아." 이어서 군인이 들고 있던 총 개머리판이 날아왔다.
그렇게 김형용이 흙이 묻은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전남 광양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된 때가 1949년 11월 말이었다. 당시는 여순사건 초기로 진압군이 '봉기군 협조자'를 검거하던 때였다. 그렇게 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고 나니 상황이 기가 막혔다. 김형용뿐만 아니라 소위 '반란군 협조자'로 의심돼 잡혀 온 이들 대부분이 억울한 사연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네는 어떻게 하다가 끌려 왔는가?" 나이가 지긋한 이가 젊은 청년에게 물었다. "형님이 군에서 휴가 나왔다가 속옷을 벗어 놓고 갔는데, 그 옷을 입었다가 그랬어요." "쯧쯧." '군용 속옷을 입고 있으면 붙잡혀 간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아저씨는 어쩐 일로 잡혀 왔대요?" 다른 청년이 나이 지긋한 이에게 물었다. "휴우." 한숨부터 쉰 그는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온다는 듯이 한동안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주먹으로 자기 가슴을 '쾅쾅' 치고 나서 입을 열었다. "아, 글씨 반란군이 물러간 후 군경이 왔다는 야그를 듣고 외출했다가 이 모양이 됐지."
"그게 어째서유?" "아, 경찰놈덜이 내가 고무신을 신었다고 붙잡아온 것이 아니겄어?" 흰 고무신은 당시 여수에서 지방좌익 세력에게 처형 당한 우익인사 김영준이 운영하는 천일고무공장에서 제조한 것이었다. 여순반란 봉기 기간에 인민위원회는 사람들에게 흰 고무신을 배급했다. 때문에 흰 고무신을 신은 사람은 인민위원회, 즉 빨갱이에 협조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실제 진압군은 흰 고무신을 신었다며 사람을 잡아갔다. 당시 절대 다수 서민들이 고무신을 신었던 것을 생각하면 기가 막힐 노릇이다(김득중, <빨갱이의 탄생>, 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