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몬펜이라 내부 상태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플래티넘 센츄리 니스 로제 UEF촉
김덕래
지금은 '안녕'을 말할 수 없습니다
만년필은 여러 이유로 예상 못 한 문제가 생깁니다. 잉크가 충전된 상태로 방치해 내부에서 말썽을 일으키는 건 가장 가벼운 축에 속합니다. 어지간하면 미온수와 세척툴 정도만으로도 컨디션을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꾹꾹 눌러쓰거나 떨어뜨려 펜촉이 살짝 휘어지면, 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가장 심각한 건 펜촉이 부러진 경우입니다. 만년필 펜촉은 사람의 심장에 비견됩니다. 꽤 손상되었더라도 어떻게든 다시 소생시킬 수 있는 여지가 있으나, 아예 부러져버리면 손을 쓰기 어렵습니다.
물론 만년필 펜촉은 여간해선 부러지지 않습니다. 일부러 혹독하게 다룰만한 이유도 없거니와, 태생이 그리 약하지도 않으니, 평생 부러진 펜촉을 한 번도 못 볼 확률이 더 높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만들어 사람이 쓰는 도구인데, 완전무결할 수는 없지요. 펜촉이 부러졌다는 건, 그 펜의 생명이 다했다는 말과 같습니다. 아직 단종되지 않은 모델이라면 차라리 다행입니다. 비용만 지불하면 멀쩡한 새 펜촉을 구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더 이상 생산하지 않을 땐 난처해집니다.
설령 단종되지 않았더라도 곤란할 때가 있습니다. 가까운 지인에게 선물 받았거나, 오래 써 담뿍 정이 들어버린 경우입니다. 그럴 때 시도해 볼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은, 펜촉을 사포로 갈아내는 것입니다. 평상시엔 절대 피해야 할 무리수지만, 펜촉이 부러지는 순간 이미 단수에 몰린 셈입니다. 돌을 내려놓고 물러설지, 아니면 활로 찾기에 나설지, 승부수를 띄워야 할 시점입니다.
이렇게 펜촉의 한쪽 티핑만 떨어져 나갔을 땐, 남아있는 부분까지 제거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최대한 부러진 티핑면과 같은 선상까지 잘라냅니다. 그 후 사포의 표면이 거친 것에서 고운 것에 이르기까지, 단계적으로 바꿔가며 다듬어야 합니다. 사포의 거친 정도를 입도라 하는데, 숫자가 커질수록 더 부드럽습니다.
우둘투둘하고 날카로운 단면을 다듬기 위해 처음엔 400번 전후의 사포를 사용하더라도, 단계적으로 600번, 800번, 1000번... 이런 식으로 점점 고운 것을 써야 합니다. 거친 사포를 사용하면 작업 속도는 빠르겠지만, 대상을 갈아내는 데만 초점이 맞춰져 있어 위험합니다. 또 처음부터 2000번처럼 매끄러운 사포를 쓰면, 거친 면을 효과적으로 연마할 수 없습니다. 솥밥을 안칠 때 처음엔 센 불을 쓰더라도, 밥 냄새가 퍼질 즈음이 되면 약불로 줄여 뜸을 들여야 맛난 밥이 지어지는 것과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