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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진작가 ‘호시노 미치오’를 다시 떠 올린 것은 순전히 지난해말 TV를 통해 본 한 방송사의 다큐멘터리 때문이다. '북극의 눈물'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된 다큐에는 호시노 미치오가 그토록 사랑했던 북극의 풍광과 그곳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가 자신처럼 사랑했던 곰의 모습이 나왔다.

다큐의 메시지가 "인간과 곰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면 이 말은 한 사진작가의 삶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바로 호시노 미치오이다.

호시노 미치오는 1952년 일본에서 출생했다. 1978년 알래스카 대학 야생 동물 관리학부에 입학했다. 학교문을 나선 뒤 줄곧 알래스카의 자연과 야생 동물 등을 사진촬영하다가 1996년 8월에 취재 중이던 캄차카에서 곰의 습격을 받고 45년 짧은 생을 마감했다.

<알래스카, 바람같은 이야기>(청어람미디어), <여행하는 나무>(갈라파고스), <곰아>(진선) 등 한국에서 출간된 호시노 미치오의 책 세권은 그가 왜 일본이 아닌 알래스카로 떠났고 그곳에서 하필 곰에 물려 죽었는지를 잘 설명해 준다.

다음 글은 세 권의 책 내용을 토대로 가상으로 꾸민 호시노 미치오와 인터뷰이다. 대부분 책 내용 그대로를 빌려왔고 어투만 일부 손질했다. 출처는 말미에 표기를 해놨다. 여행나무는 <여행하는 나무>를, 알래스카바람은 <알래스카, 바람같은 이야기>를, 곰아는 <곰아>를 뜻한다.

곰이 되고 싶은 사람, 호시노 미치오와 인터뷰
'알래스카, 바람같은 이야기'의 표지
 '알래스카, 바람같은 이야기'의 표지
ⓒ 윤평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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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래스카에서 외롭지 않았는가.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을 뿐이다.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겉보기와는 상관없다. 단지 우리가 원했던 게 이것일 뿐이다. 과연 도시는 여기보다 덜 외로울까. 거기 가면 더 행복해질 수 있을까(…) 하지만 그곳 사람들도 외롭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단지 리모컨과 몇명의 친구들이 있을 뿐이다.(여행나무 276~277p)

-현대인들은 에스키모들이 야만적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삶은 타인의 희생을 필요로 한다. 타인은 내 이웃이 될 수도 있고 자연이 될 수도 있따. 한 생명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생명이 사라져야 한다. 이것은 자연의 숙명이다. 인간도 이 같은 숙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모습이 약간 다를 뿐이지 문명사회를 지탱하는 힘 역시 약자의 희생이다. 어떤 면에서는 알래스카의 대지보다  더 춥고, 살벌한 곳이 현대사회인지도 모른다. 그 속에서 살아남은 우리들이 알래스카의 대지를 피로 물들인다는 이유만으로 에스키모와 인디언의 생활을 야만적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자기 자신의 범죄를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문명인에게 사냥이 일종의 스포츠라면 에스키모들에겐 생존의 수단이다. 따라서 가장 고귀한 행위이며 자연의 은혜인 것이다.(여행나무 243~244p)

-에스키모의 생활도 예전과 많이 달라진 것으로 알고 있다.
예전에 에스키모 생활의 중심에는 카리부(북미 지역에 서식하는 순록의 일종)가 있었고 카리부가 전부였다. 에스키모는 철따라 카리부를 뒤쫓았다. 사람들은 카리부와 함께하면서 정신적인 충만을 얻었다. 거기에는 완성된 생활이 있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서양 문명과 함께 화폐경제가 들어와 사람과 카리부의 관계가 약해지고, 사람들은 정신적인 충족을 점차 새로운 가치관에서 찾게 되었다. 하지만 그 새로운 가치관이란 것이 카리부하고는 달라서 아무리 쫓아도 붙잡을 수 없는 것이었고, 사람들은 완성된 생활에서 점점 멀어져 가버렸다.(알래스카바람 29p)

-미국의 동화정책도 에스키모들에게 어려움이었을 것 같다.
1867년 알래스카는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양도됨으로써, 베링의 알래스카 발견으로부터 126년간 계속된 러시아 통치 시대가 끝났다. 그러나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나도록 미국인에게 알래스카는 멀기만 했다. 특히 보수적인 동부 사람들에게 알래스카는 자기들의 미국 내부에는 존재하지 않는 곳이었다. 왜 그런 곳에 사람이 사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화폐경제가 침투하고, 전통의 샤머니즘이 추방되고, 학교에서는 새로운 영어를 가르치고, 토착언어를 말하면 비누로 입을 씻어야 하는 시절이 시작되었다. 미국의 동화정책이라고는 해도, 태곳적부터 그들의 삶을 엮어주고 서로를 맺어주었던 보이지 않는 끈은 가차 없이 잘려 나갔다. 그 보이지 않는 끈을 우리는 문화라고 부른다. 문화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알래스카바람 94, 121p)

-알래스카 원주민들의 알코올 중독문제가 심각하다고 하던데.
알래스카 원주민이 안고 있는 알코올중독 문제는 그 뿌리가 깊다. 이상할 정도로 높은 자살률, 폭력, 가정붕괴(…) 많건 적건 그 모든 것에 알코올이 관계되어 있다. 전통적인 삶과 파도처럼 밀려오는 서구 문화 사이에서 흔들리며 정체성을 잃고 자신감을 상실해가는 그들에게, 알코올은 도저히 어찌하지 못하는 배출구 노릇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알래스카바람 89p)

-당신은 곰의 습격으로 죽음을 맞았다. 후회는 없는가.
사냥에 성공한 에스키모들은 짐승의 영혼을 달래고, 그 희생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것이 알래스카의 율법이다. 에스키모들은 자신들 또한 늑대와 고래와 곰을 위해 희생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곰의 피를 마셨지만, 내일은 곰이 나의 피를 마실 수도 있다. 살아남기 위해 내가 한 생명을 희생시켰듯이 자연은 나를 희생시켜 다른 생명을 살리 권리가 있다.(여행나무 245p)

-곰과 당신은 다른 존재가 아닌가.
아주 오래 전, 내가 어렸을 적 곰은 이야기 속에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상한 일이 생겼다. 문득 곰이 생각났다. 전차에 내 몸이 흔들리고 있을 때였다. 횡단보도를 막 건너려는 참이었다. 곰이 깊은 산 속에서 풀숲을 힘차게 헤치며 쓰러진 큰 통나무 위를 건너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나는 알았다. 곰과 나 사이에 같은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곰아 4p)

-알래스카에서 여생을 살기로 결정한 뒤 달라진 점은.
그동안 알래스카는 어디까지나 낯선 타국이었다. 알래스카의 대자연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표를 예매해야 볼 수 있는 극장의 영화처럼 지극히 객관적인 대상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곳에 뿌리를 내려야겠다고 다짐한 후부터 모든 게 달라졌다.

예를 들어 간혹 벌판에서 마주치는 늑대조차 웬지 낯설지가 않다. 그 전에는 늑대의 모습을 사진에 담느라 정신이 없었다면 지금은 내가 지키고 보존해야 할 나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야생동물 뿐 아니라 이곳에서 함께 살아갈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제까지 그저 친한 동료로 생각되던 사람들이 이제는 내 가족처럼 다가오는 것이었다.(여행나무 226p)

-누구나 알래스카로 떠나지는 않는다.
모든 사람의 인생에는 저마다의 기로가 있게 마련이다. 그곳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인생은 다른 대답을 내놓는다.

내가 찾은 첫 번째 대답은 열여섯 살 때 방문한 미국이었다. 외국에 가는 것이 일상화된 오늘날과 달리 미국은 태평양의 끝에 위치한 머나먼 이국이었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미국에 도착해 히치하이크를 하면서 방랑하듯 마음껏 여행할 수만 있다면(…) 중학생 시절부터 남몰래 간직했던 나만의 꿈이었다. 하지만 누구 한 사람 나의 진심을 믿어주지 않았다. 열여섯 살짜리 소년이 미국을 혼자 여행하겠다니, 그저 우스갯소리로 흘려보냈던 것이다. 어린 소년의 치기가 아니었기에 나는 정말 진지했다.

그때 오직 한 사람 내 계획에 귀를 기울여준 사람이 있었다. 바로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정말 미국을 여행하고 싶다면 경비를 보태주겠다고 말씀하셨다. 샐러리맨이었던 아버지에게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을 텐데, 그리고 아직 어리기만 한 자식을 자기 자신 조차 가본 적이 없는 낯선 외국으로 보낸다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텐데, 아버지는 나의 마음을 이해했고, 또 내 결정을 존중해주고 싶어 하셨다. 1968년 여름, 마침내 나는 아르헨티나 호라는 배에 승선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자 다시 일본의 평범한 고등학생으로서의 일상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여행을 떠나기 전과 후의 나는 너무나 달랐다. 나는 이미 세계가 얼마나 넓은지 잘 알고 있었다. 그 어떤 것도 내 마음을 슬프게 만들거나 구속할 수 없었다. 미국 여행을 통해 진정한 나를 만났으니까.

여행은 내가 살고 있는 세계와 내가 살 수 없는 세계를 구별해 주었고,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볼 수 있게끔 만들었다. 그것은 내 인생에서 매우 소중한 경험이었다.(여행나무 221~223p)
'여행하는 나무'의 표지 모습.
 '여행하는 나무'의 표지 모습.
ⓒ 윤평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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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알래스카로 떠난 직접적인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소중한 사람의 죽음은 남겨진 자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나는 T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나 자신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 해답을 찾지 못한다면 내 삶은 그렇게 묻혀버릴 것만 같았다. T가 죽은 지 일 년이 되던 날, 나는 그 해답을 찾았다.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야 한다."

이것이 전부였다. 열아홉 살 때 우연히 방문했던 알래스카가 T의 죽음을 계기로 내 삶에 더욱 가까워졌다. 어쨌든 다시 한 번 알래스카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박한 일본 생활보다도 광대한 알래스카의 자연 속에서 살고 싶었다.

대학 캠퍼스로 돌아왔지만 그곳엔 이미 내가 속할 만한 세계가 없었다. 테니스 라켓을 쥐고 이야기하는 학생들, 입간판 앞에서 선동적인 구호를 외치는 학생들, 너무나 익숙했던 풍경이 낯설기만 했다. 장래에 대해 아무것도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 이 곳을 떠나지 못하면 결국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사진작업을 하게 되면서 다시 알래스카로 건너갔다. 어느새 13년이 지난 지금은 알래스카가 오히려 더 익숙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T의 죽음이 나를 여기까지 인도했던 것 같다.(여행나무 103~105p)

*T는 호시노 미치오의 중학시절부터 절친한 친구이다. 호시노의 카메라와 피켈을 빌려 산에 갔다가 조난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일본 청소년들을 모집해 일주일동안 알래스카에서 생활하도록 했다. 이유는.
칠흑같이 어둔 하늘을 차가운 불길들이 생물처럼 떠돈다. 이런 광경은 한 편의 장엄한 연극과도 같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연출해낼 수 없는 우주의 드라마, 나는 이 시간을 누군가와 함께 공유하고 싶었다. 특히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들과 즐기고 싶었다. 이 한 번의 경험이 그 아이들의 인생에서 어떤 모습으로 되살아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런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싶었다.

아이들의 기억은 어른들이 헤아릴 수 없는 세계이다. 지금이 아니라도 좋다. 일본에 가면 아이들은 다시 바쁜 일상 속으로 돌아가 루스 빙하에 관한 기억은 금세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5년 후, 혹은 10년 후 문득 오늘의 광경이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 말고도 더 넓은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여행나무 152~153p)

-알래스카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경은.
오늘날 인간의 인식 속에서 자유로운 곳은 오직 알래스카 뿐이다. 이 믿을 수 없는 세계는 시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아득한 극북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경을 꼽는다면 흰 벌판을 방황하는 카리부의 대군이다.(여행나무 135p)

-사람들은 왜 알래스카를 찾는가.
알래스카의 자연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알래스카를 통해 진정한 자신을 찾고 싶어하기 때문이다.(여행나무 256p)

-알래스카가 아닌 곳에서도 느낄 수 있는가.
바람이 불어 올 때 귀를 기울여라. 분명히 사라진 옛 이야기가 들려올 것이다. 바람이야말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유일한 화석이다.(여행나무 253p)
'곰아'의 표지 모습.
 '곰아'의 표지 모습.
ⓒ 윤평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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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네 풍습과 닮은 에스키모 전통
알래스카 앞으로 백 년 후엔 어떻게 변할까?
호시노의 책을 읽다보면 알래스카 원주민들인 에스키모의 풍속과 우리나라 풍속의 닮은 점을 발견하게 된다. 대표적인 것이 포틀래치와 에스키모 포테이토. 포틀래치란 알래스카 원주민 세계에서 영혼을 떠나 보내는 잔치이다. 죽은 자의 영혼은 이 날을 기해 여행에 나선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춤추면서 죽은 사람을 이야기하고 죽은 자에 대한 슬픔운 명랑한 분위기로 승화되어 간다. 상주의 곡 소리가 나오고 나름의 격식을 갖췄지만 흡사 잔치와도 유사한 우리나라 장례식과 포틀래치가 비슷하지 않은가. 우리나라 '까치밥'에 견줄 수 있는 에스키모 포테이토는 더욱 그렇다.

"한 에스키모 노파와 툰드라에서 보낸 가을날을 기억하고 있다. 그 노파는 흙을 꼭꼭 디뎌가면서 쥐구멍을 찾고 있었다. 쥐는 겨울에 대비하여 에스키모 포테이토라 불리는 새끼손가락만한 뿌리를 저장해 놓는다고 한다. 구멍 하나를 찾아내서 파보자 정말로 한 웅큼의 에스키모 포테이토가 나왔다. 노파는 그 중에 절반만 꺼내고는, 그 대신 가져온 말린 생선을 넣어 구멍을 다시 흙으로 메웠다. "왜?" 하고 묻는 나를, 노파는 그것도 모르느냐는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노파의 행동은 많은 것들을 말해준다. 얽히고 설킨 생명의 결 속에서서 살아가는 그들. 생각해보면 우리도 다르지 않다. 다만 그것이 잘 보이지 않는 사회에서 살고 있을 뿐."(알래스카바람 244p)

닮지 않을 수가 없다. 아시아 대륙과 북미 대륙의 사이에 놓인 베링 해의 현재 평균 수심은 불과 40미터. 빙하기에는 해수면이 지금보다 1백미터나 낮았다. 그 차이만큼 뭍으로 드러나 있던 지역이 아시아와 북미 대륙을 연결하던 베링기아이다. 인종적으로 한국인들도 속한 몽골로이드는 물이 빠진 베링 해의 평원을 지나 아시아에서 알래스카로 건너갔고 이들은 알래스카는 물론 아메리카 인디언의 선조가 됐다.
대한항공 CF에도 등장했던 호시노 미치오의 사진을 감상하고 싶다면 『알래스카, 바람같은 이야기』가 좋다. 호시노의 개인 이력과 그의 친구들로 '알래스카바람'에 등장하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제목이 매력적인 『여행하는 나무』도 괜찮다. 호시노의 유고와 사진에 적힌 메모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곰아』는 초등학생 저학년용으로 구분되지만 아이는 물론 어른이 읽어도 손색이 없다.
심화되는 지구온난화. 어쩌면 알래스카의 아름다움을 이제 호시노의 책을 통해서만, 그리고 역사에서만 확인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긴 서평을 만들었다.

"이봐, 미치오. 앞으로 백 년 후엔 여기가 어떻게 변할까?"(여행나무 137p)

덧붙이는 글 | 윤평호 기자의 블로그 주소는 http://blog.naver.com/cnsisa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

호시노 미치오 지음, 이규원 옮김, 청어람미디어(2005)


태그:#북금, #곰, #호시노 미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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