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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분위기가 전혀 다른 두 술이 있습니다. 하나는 고급 레스토랑에서나 어울릴 것 같고, 또 하나는 슬리퍼 질질 끌고 나가 먹어도 전혀 부담이 없을 것 같은 그런 술이지요. 바로 와인과 전통주(막걸리)입니다. 이 어울려 보이지 않는 이 두 술의 공통점이라면, 최근 이 술이 대중 곁으로 바싹 다가왔다는 건데요. 와인이 더 이상 별스럽지 않고, 전통주(막걸리)가 그닥 구리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준비한 '와인vs.전통주(막걸리)' 기획. 이 술들의 매력에 한번 취해보실까요. [편집자말]
회사 시민기자 조직기획부에서 나더러 와인 예찬을 써달라고 했다. 처음에는 사양했다. 대신 막걸리 예찬을 쓰겠다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불경기에 호주머니 사정도 좋지 않아 와인을 끊고 값 싸고 건강에도 좋은 막걸리로 전향(?)하는 중이었다.

한 대형 할인점의 와인 매장.
 한 대형 할인점의 와인 매장.
ⓒ 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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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안 된단다. 막걸리 찬가는 나보다 더 가난한(?) 후배가 이미 쓰기로 했단다. 이유는 그뿐이었다. 내가 '덜 가난한' 기자라는 것. 거기에다가 '그래도 사내에서 와인을 가장 많이 마시는 기자가 선배'라는 후배의 강권이 보태졌다. 그래도 망설였다. 사내에서는 와인을 가장 많이 마셔본 축에 들지 모르지만, 아는 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 월급에 무슨 와인 타령이냐'고 호사 취미를 흉볼 것도 은근히 걱정되었다. 그러나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전 세계 노동자의 동맹파업을 사주한 엥겔스도 "당신에게 있어서 행복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하지 않던가.

"샤토 마고 1848."

살며시 스며든 내 인생의 벗, 등산과 와인

하룻밤을 자고 오는 나홀로 산행에서 와인만큼 좋은 벗은 없다.
 하룻밤을 자고 오는 나홀로 산행에서 와인만큼 좋은 벗은 없다.
ⓒ 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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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토 마고'를 즐긴 엥겔스에 비하면 나의 와인 취향은 소박하다. 5만원을 넘지 않는, 대개는 3만원 이하인 요즘 말로 '싼티 와인'에 선택과 집중을 해서 마신다. 그래도 나는 와인이 있어서 더없이 흥겹다. 등산과 와인, 이 두 가지가 없었다면 내 인생이 얼마나 삭막했을까 싶다.

등산과 와인이 내 인생에 스며든 것은 불과 5년쯤 전이다. 그러나 몇 달 지나지 않아서 예감했다. 아내와 처음 사귀면서 느꼈던 그 감정처럼, 두 친구가 나와 평생을 함께 할 인생의 벗이 되리라는 것을.

사실 등산과 와인의 궁합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야영이나 비박으로 하룻밤을 지새는 먼 산에 갈 때면 나도 모르게 두 병들이 와인 캐리어에 손이 가고, 좋은 와인을 만나면 산에 가져갈 날을 손꼽아 헤아리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어느덧 산이 좋아서 와인을 마시고, 와인이 좋아서 산을 오르는 경지(?)에 이른 셈이다.

그러나 아무리 산에 미쳐도 천하의 모든 산을 오를 수 없듯이, 아무리 와인이 좋아도 이 세상의 모든 와인을 마셔볼 수는 없는 일이다. 이 세상에는 어림잡아 10여만 종류의 와인이 있다고 한다. 그 많은 와인을 종류별로 한 잔씩만 맛보는 데도 돈과 시간은 턱없이 모자란다.

와인은 평생을 마셔도 다 못 마시고, 평생을 공부해도 다 못할 만큼 어렵다. 그러나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 모두 다 에베레스트나 K2를 등정하는 것은 아니듯, 와인 애호가들이 다 로마네 콩티(ROMANEE-CONTI)나 샤토 마고(Chateau Margaux)를 마시는 것은 아니다. 산꾼들이 늘 에베레스트나 K2를 오르는 꿈을 꾸듯이, 와인꾼 역시 로마네 콩티나 샤토 마고를 마시는 꿈을 꾸는 것만으로도 행복하지 않을까 싶다.

와인, 머리로 정복하려 하지 말고 즐기자

내가 즐겨찾는 중저가 프랑스 와인 '라사스 뒤파프'(맨오른쪽).
 내가 즐겨찾는 중저가 프랑스 와인 '라사스 뒤파프'(맨오른쪽).
ⓒ 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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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는 것을 넘어서 와인을 정복하려고 마음먹으면 그 순간부터 와인은 한없이 어렵게 느껴진다(물론 와인으로 먹고 사는 직업을 택하려면 와인을 완전 정복해야 하겠지만).

우선 생소한 프랑스어가 와인꾼들을 주눅 들게 한다. 불어 특유의 비음 발음도 문제지만, 불어를 모르는 사람은 스펠링이 생소해서 읽기가 난감하다.

물론 틈틈이 짬을 내서 프랑스어 철자와 발음규칙을 배워두면 뜻을 몰라도 어지간한 라벨은 읽을 수 있다. 그래도 불어를 모르면서 와인 산지, 포도 종류, 수확연도(Vintage) 등 까다로운 표기와 등급을 머릿속에 담아두려면 쥐가 날 지경이다.

그런 생경함과 어려움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삼성경제연구소의 2007년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우리나라 기업경영인의 84%가 와인 지식 부족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응답자(404명) 중에서 ▲ 33.9%는 와인을 주문할 때 ▲ 25.7%는 와인의 맛과 가격을 구분하지 못할 때 ▲ 20.5%는 상대방이 말하는 와인용어를 못 알아들을 때 ▲ 3.7%는 와인 관련 매너를 잘 모를 때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답변했다.

그 때문인지 몇 해 전부터 주로 기업인들을 대상으로 '와인 아카데미' 붐이 불기도 했다. 와인 업계에서는 CEO(최고경영자)들이 좋아하는 와인을 선정해 발표하기도 했다. 한때 CEO들 사이에서 골프를 모르면 대화의 테이블에 못 낀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몇 년 새 테이블 화제의 대상이 와인으로 바뀌었을 만큼 와인은 '글로벌 매너'의 상징이다. 그러나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여유를 즐기면서 기분도 좋으라고 마시는 것이 술인데, 굳이 돈과 시간을 들여서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와인 공부를 할 필요가 있을까?"

스트레스 받으며 와인 '열공'할 필요 있을까?

그래서 솔직히 말하면 나는 어느 순간에 프랑스 와인 공부를 포기했다. 포기에는 스스로의 위로와 자기 합리화가 필요하기 마련이다.

"그래, 미국과 남미 그리고 호주 같은 신대륙 와인을 마시는 데도 시간이 모자랄 판인데 머리에 쥐가 나면서까지 프랑스 와인을 '열공'할 필요가 있겠어?"

국내에 처음 들어온 그루지아 와인 론칭 행사에 소개된 그루지아 와인들.
 국내에 처음 들어온 그루지아 와인 론칭 행사에 소개된 그루지아 와인들.
ⓒ 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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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살짝만 눈을 돌리면 이태리, 독일, 스페인, 포르투갈 등 다른 유럽 와인들도 많고, 칠레, 아르헨티나 같은 강한 남미 와인도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게다가 불어와 달리 스페인어와 이탈리아어는 대충 철자대로 읽어도 소통이 된다. 어디 그뿐인가. 루마니아와 그루지아 같은 동유럽 와인과 멀리는 이스라엘, 남아공 와인까지 수입되는 요즈음이다.

가격 부담이 만만치 않다. 앞에서 든 로마네 콩티나 샤토 마고 같은 최고급 와인은 물론 최상위 등급인 어지간한 AOC급(프랑스 와인의 원산지 통제 명칭제도로, 와인 병 라벨에 원산지 이름을 밝힐 수 있는 고급 와인) 와인은 가격을 물어보기조차 겁이 난다.

그러나 프랑스 와인에도 '라사스 뒤파프'처럼 중저가이면서 맛과 향이 뛰어난 와인은 많다. 또 '찾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가끔은 '샤토뇌프 뒤파프'(프랑스 론 지역 와인)처럼 보석 같은 와인을 찾아서 마시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른바 마리아쥬라는 와인과 음식의 궁합도 까다롭다. 붉은 살코기에는 레드와인, 흰살 생선에는 화이트와인이 어울린다는 것이 프랑스 와인의 일반 공식이지만 공식은 공식일 뿐, 맛보는 사람이 좋다고 느끼면 그만이다.

나는 종종 오븐에 살짝 구운 멸치 안주에도 편하게 와인을 마신다. 내가 한국 남자로서는 보기 드물게 '멸치의 사촌'쯤 되는 안초비를 좋아하는 취향임을 감안하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지만 말이다.

6·15 공동선언 기념 만찬에 오른 와인은 사실...

내가 즐겨 마시는 칠레 와인 트리오(왼쪽).
 내가 즐겨 마시는 칠레 와인 트리오(왼쪽).
ⓒ 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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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와인 취향은 이처럼 나만의 풍미와 가격을 적절하게 버무린 배합의 산물이다. 내가 즐겨 찾는 칠레 와인은 트리오(Trio) 시리즈, 파눌 오크 에이지(Panul Oak Age), 로라 하트윅(Laura Hartwig), 몬테스 알파(Montes Alpha) 시리즈이다.

그밖에도 트라피체 오크 캐스크 말벡(Trapiche Oak Cask Malbec)과 메달라(Medalla, 아르헨티나), 제이콥스 크릭(Jacob's Creek, 호주) 등으로 죄다 신대륙 와인이다.

신대륙 와인을 즐기는 내 취향은 일반적인 한국인 남성의 와인 취향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한국인 남성들의 남미 와인 선호는 어쩌면 한국인의 성깔과 취향 그리고 고답적인 프랑스 와인의 정체성이 두루 섞여서 빚어낸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또한 어쩌면 값 비싸고 품격있는 프랑스 와인을 애써 못본 체하는 '덜 가난한' 자들의 기호와 취향일 뿐인지도 모른다.

어렵게만 느꼈던 와인이 우리나라에서 대중화된 것도 김대중 정부 당시 체결한 첫 자유무역협정인 한-칠레FTA를 계기로 칠레 와인이 본격적으로 수입되면서부터이다. 이를 기념해 주한칠레대사관에서는 해마다 김 전 대통령에게 와인을 한 박스씩 선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중에 하나가 스페인어로 '포옹, 사랑, 희망'을 뜻하는 파눌(Panul)이다. 김대중-김정일 두 정상의 역사적인 6·15 공동선언을 기념하는 만찬에 파눌이 오르는 것도 이런 연유다.

6.15 정상회담 기념만찬 행사에 나온 칠레 와인 파눌(Panul). 우리말로 '포옹'을 뜻한다.
 6.15 정상회담 기념만찬 행사에 나온 칠레 와인 파눌(Panul). 우리말로 '포옹'을 뜻한다.
ⓒ 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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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방 고콜레스테롤 식사를 하는 프랑스인들이 심장계 질환의 사망률이 낮은 현상을 가리켜 '프렌치 패러독스'라고 한다. 몇 해 전부터 우리나라에 와인 열풍이 분 것도 프렌치 패러독스의 영향이 크다.

그러나 와인도 엄연히 알코올이다. 프랑스인들은 평생 매일 와인을 마셔도 건강한 사람들이 많다지만, 한국인들에게 알코올 중독자가 적은 것은 폭음을 하지만 매일 마시지는 않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집에서 매일 혼자서 와인을 홀짝일 정도면 와인 중독을 경계해야 한다. 등산도 혼자서 하는 산행을 즐길 정도면 산중독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나홀로 산행은 사색의 여유를 주지만 곤경에 처했을 때 주위의 도움을 받기가 어렵다. 가족이나 지인들과 대화 없는 와인도 마찬가지다. 프랑스 속담에도 이런 말이 있지 않던가.

"혼자 마시는 와인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 인생과 같다."

내가 즐겨 찾는 와인 아울렛 '라빈'의 신대륙 와인 코너.
 내가 즐겨 찾는 와인 아울렛 '라빈'의 신대륙 와인 코너.
ⓒ 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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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은 인생의 고비를 되새기는 '반추주'

흔히 후회하지 않는 인생은 없다고 한다. 인생이 후회의 연속이라면, 와인은 그 인생의 고비를 되돌아보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반추주(反芻酒)이다.

그러나 와인을 너무 탐닉하면 이 역시 '과유불급'이다. 특히 와인은 발효주인 까닭에 과음하면 숙취가 오래 가는 '골 때리는 술'이다. 프랑스 속담에는 이런 말이 있다.

"여인과 돈 그리고 와인은 즐거움도 주지만 해독도 끼친다."

그래서 와인은 인생의 절제와 후회가 없는 청년들의 취향에는 맞지 않는 술이다. 어쩌면 사람들이 니은(ㄴ) 받침이 있는 나이가 되어야 와인을 즐기는 것도 그 때가 숙성된 인생의 참맛을 깨닫기 시작하는 나이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하긴 '와인'이란 글자에도 'ㄴ' 받침이 붙긴 한다.

덧붙이는 글 | 지난해 나는 와인 소믈리에 출신의 한 출판인으로부터 와인 책을 선물로 받은 적이 있다. 그녀는 그 책의 내지에 이렇게 썼다.

"언젠가 지리산 정상에서 와인 한잔 부딪칠 수 있기를 꿈꿉니다."

이왕이면 그곳이 보름달이 휘영청 걸린 '벽소명월'이었으면 더 좋겠다.



태그:#와인예찬, #칠레 와인, #트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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