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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군부와 국방부가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기정사실로 하는 언급을 잇달아 내놓아 그 배경과 의도에 초미의 관심이 모이고 있다. 논란은 <연합뉴스>가 9일 미국 합동사령부의 2008년 연례보고서 내용을 인용 보도하면서 시작됐다.

 

2008년 11월 25일 공개된 '2008년 합동작전 환경평가 보고서(2008 Joint Operation Environment)'에서는 "아시아 대륙 연안에는 이미 5개의 핵보유국(nuclear powers)이 있다"며, 중국·인도·파키스탄·북한·러시아를 차례로 언급했다.

 

미국 정부가 공개 문서에서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표기한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이에 따라 국내에서는 '미국이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다.

 

그러자 한국의 외교통상부와 국방부 등 정부부처는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으로 볼 수 없다며, "미국 정부가 필요한 수정조치를 하기로 했다"며 진화에 나섰다. 논란이 확산되자, 미국의 합동군사령부는 "이는 공식적인 미국 정부의 정책을 반영한 것이 아니다"라고 해명하면서도, 보고서 수정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국무부 대변인도 "그것은 미국의 정책이 아니다"라고 거듭 확인했다.

 

그러나 미국 국방정책 최고 책임자인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이 포린어페어 2009년 1·2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북한은 몇 개의 핵폭탄을 제조했다"고 적시함으로써 논란은 확대재생산되고 있다. 지금까지 미국 정부는 "북한이 6개 안팎의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플루토늄을 보유하고 있고, 핵실험을 했다"고 언급했지, 명시적으로 북한이 핵폭탄을 제조했다는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이는 한국 정부도 마찬가지다.

 

북한에 잘못된 신호 보낼 수 있어

 

미국이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간주하는 듯한 뉘앙스만 풍겨도 그 파장은 엄청날 수밖에 없다. "미국이 북한의 핵보유는 묵인하고 핵확산 방지에만 주력할 것"이라는 일각의 의혹을 부채질할 뿐만 아니라, 북한에도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

 

2005년 2월 핵보유 선언에 이어 2006년 10월 핵실험을 강행한 북한은 핵보유국 지위를 확보하고 싶어할 것이다. 이러한 욕망을 포기하게 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핵을 보유한 상태에서는 경수로 제공, 평화협정 체결, 북미관계 정상화 등 북한의 핵심적인 목표가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두는 것이다. 이를 위한 대전제는 미국이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임은 물론이다.

 

그러나 미국 정부와 군부의 잘못된 신호는 북한의 전략적 결단을 더욱 어렵게 할 수 있다.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이 <연합뉴스> 보도 다음날인 10일, "미국이 정부 보고서에서 조선을 핵무기 보유국으로 공식 인정하고 발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신속하게 보도한 것은 미국의 신중하지 못한 언행이 북한의 그릇된 욕망을 부채질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북한 매체가 '표기'나 '명시'가 아니라, "공식 인정하고 발표한"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 주목된다.

 

미국이 북한의 핵보유를 기정사실화하는 듯한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한미관계 및 군사적 준비태세에도 상당한 파장을 몰고 올 수 있다. 지금까지 두 나라는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군사적 억제력을 강화하는 한편, 6자회담을 통한 외교 해결을 모색해왔다.

 

그런데 북한이 이미 핵무기를 제조했고, 또 미국이 이를 인정한다는 뉘앙스를 풍기면, 한국의 미사일방어체제(MD) 및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전면 참여 및 북한의 핵무기를 겨냥한 전략 능력 확보와 같은 군비증강 논리가 득세할 수 있다. 특히 '한국도 핵무기를 개발해야 한다'는 극우 논리가 더욱 커질 수 있다.

 

 

이란과 이스라엘도 핵보유국 인정?

 

그렇다면 이 논란의 배경과 미국의 의도는 무엇일까? 일단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표기하는 것과 이를 인정한다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핵보유국으로 '표기'한 것은 북한의 핵능력에 대한 평가에 따라 사실관계를 언급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인정한다는 것은 정치외교적·전략적 판단이 수반되는 문제다. 따라서 북한 핵보유국 '표기'를 '인정'과 동일시하는 것은 큰 오류다.

 

문제가 된 합동군사령부 보고서에서 나온 이스라엘에 대한 언급은 이러한 분석을 뒷받침한다. 이 보고서 37쪽에서는 "서쪽의 이스라엘부터 부상하는 이란, 파키스탄, 인도 및 동쪽의 중국, 북한,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핵보유국이 늘어나고 있다"고 언급했다. 아직 핵실험도 하지 않은 이란은 물론이고, 이스라엘까지도 핵보유국(nuclear powers)이라고 표기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단 한 번도 공식적으로 이스라엘의 핵보유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이 이미 수백개의 핵무기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공식 인정할 경우 이란을 비롯한 중동 국가들의 핵보유를 막을 명분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미국이 정권교체기이기 때문에 국방부 장관과 합동군사령부의 언급을 면밀히 검토할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도 고려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부시 행정부는 레임덕에 빠져 있고, 오바마 당선자는 그럴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12월 5일, MD 실험 주목!

 

이러한 사정을 고려하더라도 미국, 특히 군부의 의도는 석연치 않다. 이와 관련해 12월 5일 단행된 미국의 미사일방어체제(MD) 실험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국 국방부는 "북한의 가상 장거리 미사일을 태평양 상공 3천km 위에서 요격하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특히 "이번 실험은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복잡한 것"이었다며, 실험 성공으로 "우리는 MD에 대한 더욱 강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강조했다. 

 

이 실험을 주목해야 할 몇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 우선 이번 실험과 합동군사령부 및 게이츠 국방장관의 북한 핵무기 관련 언급이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또한 이번 실험은 북한의 가상 미사일에 MD를 교란하는 대응수단을 장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실시됐다. 이는 국방부가 실험 성공을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를 고의로 뺐다는 의혹을 낳고 있다.

 

더욱 주목해야 할 점은 MD 프로그램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미국 군부가 북한의 핵보유를 잇달아 언급하고 MD 실험을 단행했다는 것이다. MD에 사활을 걸었던 부시 행정부와는 달리 오바마 당선자는 기술적인 성능이 입증되어야 MD를 지지할 수 있다는 '조건부 찬성' 입장을 갖고 있다.

 

특히 미국의 경제위기가 악화되면서 국방예산에 대한 압박이 높아지고 있어 일부 무기 프로그램의 재검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오바마 측근들은 연간 100억달러(15조원) 이상의 막대한 예산이 소요되고 러시아와 갈등을 일으키는 MD를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여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 군부가 북한과 이란의 핵위협을 강조하면서 MD 실험에 성공했다고 하는 것은 곧 들어설 오바마 행정부에게 '위협의 심각성'과 'MD의 우수성'을 동시에 전달하는 효과가 있다. 느닷없이 나온 '북한 핵보유국 명기'와 '북한 핵폭탄 제조설'은 이를 겨냥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미국 정보기관과 군부는 과거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MD에 대한 중요한 결정에 앞서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을 과장했었다.

 

미국 군부의 의도는 MD로만 끝나지 않는다. 합동군사령부 보고서에서는 2030년 이전에 핵전쟁 발발 가능성을 경고하면서, 이를 대비하기 위해 미국은 핵전력을 재건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게이츠 국방장관 역시 새로운 핵무기 개발의 필요성을 언급해왔다. 그러나 오바마는 핵무기에 대한 안보정책의 의존도를 낮추고 핵무기 없는 세계를 만드는데 미국이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며, 새로운 핵무기 개발에 부정적이다. 북한과 이란의 핵위협을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오바마의 판단을 뒤흔들 수 있는 유력한 구실로 작용할 수 있다.

 

한국, 미국 군산복합체 의도에 말려들지 말아야

 

'북한위협론'은 미국의 MD 추진 및 한국과 일본 등 동맹국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어 왔다. 부시 행정부가 두 나라에 참여 압력을 행사했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일본은 전면적인 참여를, 한국은 공식적으로는 불참하면서도 미국의 MD 시스템 배치를 허용하는 쪽으로 움직여왔다.

 

그런데 미국 정부가 북한의 핵능력을 달리 평가하면 한국의 MD 참여 압력과 국내의 찬성 여론도 높아질 수 있다. 또한 북한 핵무기에 대한 전략적 거부 능력을 확보하는 것 역시 대부분 미국제 무기 수입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극심한 경제위기와 외교를 중시하는 오바마의 등장으로 또 다시 위기에 처할 미국의 군산복합체로서는 구미가 당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명박 정부는 미국 정부에 합동군사령부 보고서 및 게이츠 국방장관의 기고문에 대해 시정 요구를 강력하게 제기해야 한다. "북한이 핵보유국"이라거나 "북한이 핵무기를 제조했다"는 표현은 지금까지 한미간의 정보 판단을 뒤집는 것일 뿐만 아니라, 북한에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는 중대 사안이기 때문이다.


태그:#핵보유국, #북한,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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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의 관심 분야는 북한, 평화, 통일, 군축, 북한인권, 비핵화와 평화체제, 국제문제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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