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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 국무총리로 내정된 김태호 전 경남지사가 8일 오후 서울 광화문의 한 오피스텔에 들어서며 취재진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신임 국무총리로 내정된 김태호 전 경남지사가 8일 오후 서울 광화문의 한 오피스텔에 들어서며 취재진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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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호 국무총리 후보자가 정치를 처음 시작할 당시 금품 살포로 구속된 국회의원 후보자를 옥중 당선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실이 밝혀졌다.

김 후보자가 젊은 시절부터 남다른 정치 감각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지만, 국무총리 경력의 출발점으로는 문제의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동안 김 후보자는 1992년 한나라당 이강두 의원(현 국민생활체육회 회장)의 보좌관으로 채용되며 정치권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오마이뉴스>의 확인취재 결과, 김 후보자는 이 의원이 같은 해 14대 총선(경남 거창)에 출마할 때부터 선거운동에 깊숙이 관여했다.

문제는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강두 후보가 금품 살포로 물의를 빚고 영어(囹圄)의 몸이 됐다는 점이다.

이 후보의 선거운동원 2명은 그해 2월 23일(이하 1992년) 민주자유당(한나라당의 전신) 거창지구당 개편대회에 참석한 당원 3000명에게 식비와 교통비 1만3000원씩 총 3900만 원을 살포했는데, 1만 원권 지폐뭉치를 주고받는 현장이 이튿날 <국민일보>에 사진 기사로 보도된 게 사건의 발단이었다.

금품을 뿌린 현장이 적발되자 여당과 검찰은 사건의 파문을 덮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2월 26일 이강두 후보와 신모 사무국장은 선거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고, 노태우 당시 대통령과 김영삼 민자당 대표(YS)는 이 후보의 공천을 철회하고 이현목 신흥토건 사장을 새 후보로 내세웠다.

갈수록 상황이 불리해지자 이 후보의 가족조차 "선거를 포기하고 당국의 선처를 기다리자"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는데, 이런 분위기를 바꾼 사람이 바로 김태호 후보자였다.

한나라당 거창 당원협의회의 관계자는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연일 신문과 방송에서 '거창 사건', '거창 사건' 떠들어대니 이 후보의 가족들은 마치 죄인처럼 움츠러들었는데, 김 후보자는 '이강두 후보가 큰맘 먹고 고향에 돌아왔는데, 지금 무너지면 앞으로 아무 일도 못한다. 옥중 출마라도 해야 하고, 충분히 승산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김 후보자는 30세의 청년이었지만, 손윗사람들도 그의 얘기를 무시하지 못했다고 한다. 서울에서 유학하면서 YS의 최측근 김동영 전 정무장관의 집에 기거하며 현실 정치를 어깨너머로 배웠고, 대학생 시절에도 김동영씨의 선거운동을 여러 차례 했기 때문에 '나이는 어리지만 선거에는 잔뼈가 굵은 인물'로 통했기 때문이다.

선거엔 잔뼈가 굵은 인물... "김태호 후보자가 옥중 출마 권유"

이강두 후보가 옥중 출마를 결정하자 김 후보자의 호언대로 일이 술술 풀렸다.

우선 거창의 당심(黨心)이 중앙당의 방침을 순순히 따르지 않았다. 거창 당원협의회의 한 관계자는 "그 당시 거창의 민자당 당원이 3000명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는데, 당원의 절반가량이 이 후보와 함께 탈당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여당 후보는 조직을 넘겨받지 못해 줄곧 고전했다"고 전했다. 고 김동영 장관의 보좌관 등 6명이 출마하는 다자대결 구도도 조직이 탄탄한 이 후보에게 호재로 작용했다.

그러나 이강두 캠프 사람들을 무엇보다 놀라게 한 것은 거창 주민들의 마음을 파고든 김 후보자의 선거 전략이었다.

이강두 캠프에서 김 후보자가 맡은 직책은 선거기획팀장. 후보와 사무국장이 모두 감옥에 갇힌 상황에서 캠프의 '브레인' 역할을 하게 된 셈이다.

김 후보자의 비서실장을 맡은 최기봉씨는 "(김 후보자가 1992년 총선에서 선거기획팀장을 한 것은) 맞다"며 "젊은 시절부터 정치에 꿈을 가지고 여러 가지 공부를 했고, 서울에서 상도동계 어르신들의 정치를 지켜봤기 때문에 30세 나이에 선거운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강두 캠프는 "정직하고 순진한 이강두 후보가 중앙정치의 희생양이 됐다"는 논리로 지역 민심을 자극했다.

1992년 총선에 출마한 이강두 후보(경남 거창)의 선거공보물. 이 후보는 그해 12월 항소심에서 유죄 취지의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다.
 1992년 총선에 출마한 이강두 후보(경남 거창)의 선거공보물. 이 후보는 그해 12월 항소심에서 유죄 취지의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다.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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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선거공보에는 이런 내용이 씌어 있다.

"뜻있는 언론들은 이강두 후보가 정직하고 착한 사람이다보니 희생양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지금 전국의 선거판에서는 소위 거창사건보다 몇 배 더한 온갖 부정과 타락이 난무하고 있으면서도 우리 거창을 제물로 삼아 공명선거의 선전물로 활용하고 있다.

우리 거창은 속없는 바보들만 사는 동네가 아니다. 이번 사건은 거창을 잘 길들여진 촌동네로 보고 막 다루어도 된다는 거창 경시 풍조에서 나온 작태임을 우리 거창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한 손으로는 부족하다. 두 손으로 밀어달라"는 선거 슬로건도 김 후보자의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라고 한다. 이강두 후보의 기호가 6번이라서 한 손만으로 기호를 표시할 수 없는 점을 감안했다.

"무소속은 당선되더라도 안 받아들이겠다. 여당이 안 받으면 아무 일도 못한다"는 YS의 지원 유세도 소용이 없었다.

마침내 3월 24일 선거에서 이강두 후보(2만2018표)가 민자당 이현목 후보(1만3329표)에게 여유 있게 승리를 거뒀다. 승리의 1등 공신이었던 김 후보자가 이강두 의원의 보좌관에 채용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선거운동 과정에서 금품을 살포한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만큼 이 의원의 퇴출은 시간 문제였다.

4월 22일 마산지법 진주지원 형사합의부(재판장 정은환 부장판사)는 이 후보와 신모 사무국장에게 징역 1년형을 각각 선고했다. "공명선거 염원이 어느 때보다 절실했던 국회의원 선거에서 많은 현금을 살포해 선거의 공명성을 해친 행위는 실형을 받아 마땅하다"는 판결 취지였다.

그러나 12월 30일 부산고법 제1형사부(재판장 박영우 부장판사)는 원심을 깨고 항소심에서 선고유예 판결을 내렸다. 박 판사는 "이 의원이 금품을 뿌린 혐의는 인정되지만 받은 사람들이 당원들이고 옥중출마로 49%의 지지를 얻어 당선된 점을 참작해 1심 판결을 파기한다"고 판시했다. 한마디로 '죄 지은 건 맞지만 당선됐으니 봐준다'는 논리였다.

금권선거 당선자를 봐주는 엉터리 판결을 바로잡을 기회는 대법원으로 넘어가게 됐다. 그러나 항소심에서 패한 검찰이 상고를 포기해 이 의원은 대법원 확정 판결 없이 의원직을 지키게 됐다. 부산고검에 상고지시를 내리지 않은 김두희 검찰총장이 이 의원의 지역구에 인접한 산청 출신이라는 점을 놓고 당시에도 말이 많았다.

어쨌든 법원 판결은 이강두 의원은 물론이고 그를 모시던 김태호 후보자의 정치 역정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강두 보좌관 경력을 발판으로 삼아 그는 1995년 여의도연구소 사회정책실장 → 1998년 경남도의원 → 2002년 거창군수→ 2004년 경남도지사로 빠르게 성장했다.

그럼에도 국무총리 후보자의 정치 경력이 금품 살포로 물의를 빚은 정치인의 선거 기획에서 출발한 것은 매끄럽지 않은 뒷맛을 남긴다. 최기봉 비서실장은 "김 후보자가 그런(금품 살포) 부분까지 알았겠냐? 지금 같으면 (출마는) 생각조차 못할 일"이라고 선을 그었다.


태그:#이강두, #김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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