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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시위를 하고 있는 선한 사람들에게 전합니다. 나는 고귀한 투쟁을 벌이고 있는 여러분들이 잘 되기를 기원합니다(To the good people protesting. I wish you well, in your noble struggle).

 

또한 시위 도중에 돌아가신 용감한 분들에게 말씀 드립니다. 나는 당신들의 용감한 행동이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또한 다음 세대들에 의해서 그 정신이 찬양받기를 희망합니다(To the brave people who died during the protests, I believe that their brave actions will always be remembered and hopefully be praised by the future generations).

 

당신들의 투쟁은 결코 공허한 것이 아닙니다(Your actions never not in vain).

 

2009년 1월 23일,

 

잭 먼디(Jack Mundey) / 호주환경재단 평생회원

 

호주 환경운동의 살아 있는 전설, 잭 먼디

 

위에 소개한 글은 호주가 낳은 세계적인 환경운동가 잭 먼디(80)가 '용산 참사' 희생자들에게 보내는 위로 편지다. 또한 지금도 '도시 재개발계획'을 반대하면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 서울 시민들에게 보내는 격려 메시지이기도 하다.

 

그런데 NSW주 건설노동조합(The Builders Labourers Federation) 리더였던 잭 먼디는 왜 뜬금없이 한국에 사는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 위와 같은 내용의 편지를 썼을까?

 

한마디로 동병상련의 심정일 것이다. 그가 재개발 붐이 한창이던 1970년대 시드니에서 용산과 비슷한 반대시위를 벌인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또한 시위를 통해서 시드니의 재개발을 성공적으로 막아냈기 때문이다. 옛 것과 새 것이 아름답게 공존하도록 말이다.

 

서울이라는 단어를 시드니로 바꾸면 정확하게 일치하는 '시드니 재개발계획(Sydney Redevelopment Scheme 1970)'을 폐지하도록 만든 것. 그는 1970년의 성공을 발판으로 그 후 30년 동안 42군데의 시드니 재개발계획을 막아낸 전설적인 인물이다.

 

잭 먼디는 "건물을 철거하면서 역사와 환경을 파괴하고, 더구나 그 건물에 살고 있던 저소득층 주민들을 쫓아내는 건 야만적이고 비인도적"이라는 주장을 펼쳐서 시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어 42전 42승을 기록했다.

 

"한국의 민주화 후퇴... 믿기 어렵다"

 

호주 언론은 최근 한국에서 발생한 용산참사 소식을 크게 보도했다. 뉴스를 접한 대부분의 호주사람들은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렸고, 특히 진보적인 인사들은 한국의 민주화가 빠르게 후퇴하는 현실을 크게 우려했다. 잭 먼디도 그중 한 사람이다.

 

1월 24일 오전, 시드니 서부지역에 거주하는 먼디씨 집으로 찾아가서 인터뷰를 했다. 그는 '살아 있는 전설'이라는 명성과는 걸맞지 않게(?) 아주 작은 연립주택에서 검소하게 살고 있었다. 법정변호사로 활동하는 부인 쥬디스 먼디 여사와 함께.

 

1996년 이후 대여섯 차례 기자와 인터뷰를 한 바 있는 먼디는 반가운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인터뷰는 그의 집 뒤뜰 잔디밭에서 이루어졌다. 때마침 그의 집 잔디를 깎아주기 위해서 찾아온 앤토니 채키(48)도 인터뷰에 합류했다.

 

채키는 "잭은 노동자들의 신망이 아주 두터운 살아 있는 전설"이라면서 "우리는 시내에 나갈 때마다 '땡큐 잭!'이라는 말을 수도 없이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그렇게 큰 업적을 남겼음에도 정작 본인은 이토록 소박하게 노년을 보내고 있다"면서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이 불에 타서 죽다니... 21세기에 어떻게 그런 일이"

 

잭 먼디는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지난 10년간 괄목할 만한 민주화를 성취한 한국에서 왜 안타까운 뉴스들이 계속 들려오는지 모르겠다"면서 "특히 용산 참사 소식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다음은 잭 먼디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 최근에 발생한 용산 참사 뉴스를 접하고 무슨 생각이 들었나?

"처음에는 내 눈과 귀를 의심했다. 팔레스타인 양민들에게 폭탄을 퍼부은 이스라엘과 무엇이 다른가? 오늘의 서울과 1970년대의 시드니가 같을 수 없지만, 도시 재개발계획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의 저항을 유발했다는 측면에서 똑같다."

 

- 서울의 생존권 투쟁과 옛 것을 지키자는 시드니를 비교하는 것은 억지가 아닐까?

"그렇지 않다. 시드니도 저소득층의 생존권 투쟁이 더 큰 이슈였다. 거대자본인 도시재개발회사와 정부가 한 편이 되어서 새 건물에 입주할 능력이 없는 원주민들을 쫓아내는 만행은 민주국가에서 용납될 수 없기 때문이다."

 

- 용산 참사 뉴스 중에서 특히 어떤 대목에 충격을 받았나?

"희생자들이 불에 타서 죽는 장면은 상상만으로도 너무 끔찍했다. 21세기 문명국가에서 그런 사건이 발생했다는 사실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한 번 비극적으로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을 빈다. 사망한 경찰관도 시대의 희생자인 건 마찬가지다."

 

 

"1970년의 시드니와 2009년의 서울은 똑같다"

 

- 로이터통신에는 그런 내용이 없지만, 그들이 실정법을 위반하는 과격한 불법시위를 벌였다는 한국발 뉴스도 있는데.

"실정법 범위 안에서 시위를 하면 바람직하겠지만, 벼랑 끝에 몰린 철거민들이 어떻게 허공에 대고 '재개발 반대!'라는 구호만 외칠 수 있겠는가? 1970년 당시 시드니 재개발 반대시위도 격렬한 건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경찰이 곤봉을 휘두르는 상황에서 말이다."

 

- 그러나 호주 경찰은 강압적인 시위진압을 하지 않는 걸로 아는데.

"대체로 그런 편이다. 그러나 시위가 격렬해지면 대응 수위가 높아지는 건 마찬가지다. 그런데 1970년대 시드니는 경찰의 곤봉보다 건설개발업체가 고용한 용역들의 행패가 더 견디기 힘들었다. 그들은 정말 끔찍한 악마들이었다."

 

- 호주에도 그런 용역회사 직원들이 있었단 말인가? 그러면 깡패 수준?

"깡패 수준이 아니라 실제로 깡패들이었다. 그들은 철거대상자들과 건설노조 소속 시위대들에게도 아주 심한 행패를 부렸다. 물론 건설개발업자의 사주를 받은 로봇 같은 행동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나중엔 그것조차 미워졌다."

 

- 당신의 얘기를 듣다 보니 마치 한국 얘기를 듣는 것 같다.

"알고 보면 한국이나 호주에서만 발생한 비극이 아니었다. 개발 붐이 한창이던 시대의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존 스타인벡이 쓴 <분노의 포도>에 나오는 스토리도 똑같지 않은가. 문제는 호주와 미국에선 오래 전의 역사가 됐는데 한국에서는 현재형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호주 재개발건설업체는 오직 이익만 추구했다"

 

- 본격적으로 투쟁하기 전에 재개발 건설업체 관계자들을 설득해 보았나?

"초기에 잠깐 시도는 해보았다. 그러나 그들이 오직 개발이익만 추구하는 이기주의자들이라는 걸 알아채고 바로 포기했다. 지금 생각해도 아주 현명한 판단이었다. 엄청난 이익 앞에서 눈이 멀어버린 사람들에게 인도주의나 환경 보존은 공허한 수사에 불과했다."

 

- 정부의 반응과 대응 또한 궁금한데.

"정부 안에도 저소득층의 생존권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오래된 건물의 역사적 가치를 존중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러나 건설업체와 연결된 소수의 부패한 공무원이 일을 그르치곤 했다. 결국 그들은 대부분 감옥에 갔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가 이길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가 그들의 부패였다."

 

- 낙후한 도시를 재개발로 새롭게 단장하는 게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지 않은가?

"그 지역의 주민이 동의하고, 환경을 파괴하지 않는다면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원주민이 피해를 보고 주변 녹지대가 파괴된다. 어린이들이 맘껏 뛰놀 수 있는 공원 하나 없는 거대한 빌딩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 혹시 건설노조가 특정 지역의 재개발에 동의한 케이스도 있었나?

"물론이다. 그러나 아주 적은 숫자다. 십중팔구는 재개발업체의 탐욕과 비인도적인 처사가 원인이 되어 반대투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힘없는 사람들을 상대로 조직적인 강탈을 꾀했다."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의 결합

 

1970년대 건설노동자들의 시드니 재개발계획 반대투쟁을 '그린 밴스(Green Bans)'라고 불렀다. 그들은 저소득층에게 해를 입히거나 환경문제를 일으키는 재개발 현장에서는 노동을 하지 않는다는 다음과 같은 원칙을 만들어서 철저하게 고수했다.

 

"모든 빌딩은 지역공동체 전부의 이익에 부합하고, 예외 없이 환경친화적이어야 한다(Buildings must be being to the environment and benefit the whole community)."

 

'그린 밴스'를 창안하고 오랫동안 리더로 활동했던 잭 먼디씨는 18살의 어린 나이에 건설노동자가 되었다. 그는 타고난 리더십을 인정받아 1969년 NSW주 건설노조의 리더가 됐다. 그러나 그는 환경운동을 잘 알지 못했다.

 

그 당시 임금인상과 건설현장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 행하는 건설노동자의 보이콧을 '블랙 밴스(Black Bans)'라고 불렀다. 거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먼디씨는 환경을 파괴하는 현장에서 노동을 보이콧하는 것을 '그린 밴스'라고 이름 붙였다.

 

'녹색 지킴이'로 다시 태어나다

 

1970년 여름, 시드니 헌터스 힐 바닷가에 사는 주부 13명이 잭 먼디씨를 찾아왔다. 그들은 'A V 제닝스'라는 호주 최대의 건설회사가 '켈리 부시 공원'을 사들여서 고급주택을 지으려고 하는데, 그걸 건설노조가 막아 달라고 부탁했다. 어린이들의 놀이터를 소수의 부자들에게 양보할 수 없다는 것.

 

먼디씨는 먼저 그 회사를 찾아가서 공사를 포기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그들은 막무가내였고, 건설노조를 상대로 법적 소송까지 불사했다. 그러자 건설노동자들은 노조를 지원하기 위해서 보이콧에 들어갔다.

 

결국 'A V 제닝스'는 재개발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환경운동에 대해서 잘 몰랐던 잭 먼디씨의 눈이 번쩍 뜨였다.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이 결합된 세계 최초의 '그린 밴스'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먼디씨는 30년 동안 '그린 밴스' 활동을 꼼꼼하게 기록하여 학자들의 연구과제로 제공했다. 나중엔 그 공로로 웨스턴시드니대학교 도시공학 명예박사학위까지 받았다. 한편 NSW주 정부는 '그린 밴스'로 지켜낸 오페라하우스 건너편 아길 스트리트를 '잭 먼디의 세상(Jack Mundey's Place)'으로 이름 붙였다.

 

아길 스트리트를 포함한 록스(The Rocks) 지역은 시드니에서 손꼽히는 관광명소가 되어 해마다 수백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온다. 그런 연유로 시드니에서는 "환경운동이 지역경제를 망치게 만든다"는 섣부른 논리는 통하지 않는다.

 

 

"1988년 서울올림픽은 '그린 밴스' 덕을 봤다"

 

- 지난번에 만났을 때, 서울올림픽이 '그린 밴스'의 덕을 봤다고 말했는데.

"1972년에 시드니가 주도인 NSW주 정부에서 시드니올림픽을 기획했다. 그러면서 IOC에 올림픽경기장 건설계획을 보고했는데,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심 공원인 센테니얼파크에 경기장을 짓겠다고 약속했다. 그걸 '그린 밴스'가 막았다. 1988년 시드니올림픽을 유치하려고 했던 NSW주 정부는 결국 올림픽경기장 건설 부지를 마련하지 못해 유치 계획을 포기했다. 시드니 도심에 위치한 여의도 크기만한 공원에 경기장을 지을 수 있었다면 서울이 시드니를 이기기 힘들었을 것이다."

 

- '그린 밴스'의 반대운동을 찬성하는 시민도 있었겠지만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많았을 것 같은데.

"올림픽 유치를 원하지 않는 호주 사람은 많지 않았다. 건설노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올림픽 유치를 위해 센테니얼파크를 포기하자는 의견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엄청난 반대시위가 벌어졌다. 그 시위에는 호주의 유일한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패트릭 화이트도 적극 참여했다."

 

- 결국 2000년에 시드니올림픽이 열렸는데, 그때는 찬성했나?

"그렇다. 지금 올림픽경기장이 있는 홈부시는 쓰레기 매립장이었다. 뿐만 아니라 최초로 '그린 올림픽'을 준비하여 성공적으로 치렀다. 건설노조도 적극 참여하여 환경친화적 올림픽이 열리도록 했다."

 

- '그린 밴스'에 가장 크게 도움을 준 사람들은?

"진보적인 성향의 호주 국영 abc-TV 기자와 PD들이었다. 또한 <시드니모닝헤럴드> 기자들은 적극적으로 '그린 밴스'를 보도하면서 건설노동자들의 주장이 집단이기주의가 아닌 공동의 이익을 위한 희생적 투쟁이라는 사실을 널리 알려주었다."

 

"시드니 환경지킴이 30년, 후회 없다"

 

- '그린 밴스'가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건설노조의 투쟁에 중산층을 끌어들이기로 한 결심이었다. 그건 독일의 환경운동가 페트라 켈리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다. 1970년대 초에 시드니를 방문한 켈리가 '노동자와 중산층이 힘을 합하지 않으면, 현대사회의 특성상 거대자본 앞에서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해준 걸 그대로 수용했다."

 

- 1979년에 세계 최초의 독일 녹색당을 창립했고 국회의원이 되어 리더로 활동했던 페트라 켈리는 오히려 '그린 밴스' 덕분에 도시환경운동의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말했는데.

"그때까지는 환경운동에 도시지역은 포함되지 않았다. 나는 절대다수의 인구가 도시로 집중된 상태에서 도시를 제외시킨다는 게 모순이라는 생각으로 '도시환경운동'을 제안했는데,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던 켈리가 그걸 흔쾌히 받아들여 유럽에 전파했다는 사실에 큰 자긍심을 느낀다. 내 자랑 같아서 조심스럽지만, 호주의 '그린 밴스 선풍'이 전 세계로 빠르게 퍼져나가는 걸 보고 앞날의 희망을 보았다."

 

- 30년 동안 활동하면서 혹시 후회한 적은 없는가?

"인류의 자연은 당대 사람들만의 소유가 아니다. 미래 세대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마구잡이 개발로 자연을 훼손하면 그들에게 죄를 짓는 것이다. 사람은 옛 것을 통해서 미래를 가늠해야 하는데 그걸 다 부숴버리면 어떻게 하나? '그린 밴스'가 그걸 막았다는 측면에서 내 인생의 후회는 없다."


태그:#잭 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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