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수만보는 '사진과 수필로 쓰는 만인보'의 줄임말입니다.[기자말] |
손옥희는 할아버지의 동경고등사범 사진에서 눈을 거두고 호소문을 이어서 써갔다. 쓰면서도 멈칫멈칫한다. 과연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구속자의 유족은 모일 수 있을까? 골령골 유족은 수천 명에 이르고 불법학살임이 분명하지만 정판사 피고인은 열명에 불과하고 경제사범, 파렴치범으로 손가락질을 받았다. 70여년 가까이 꼭꼭 숨어 지냈을 터인데 과연 모일 수 있을까? 모인다고 제대로 힘을 낼 수 있을까?
손옥희는 그래도 모이면 힘이 날거야 자신을 달래며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을 현장에 나오셔서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하겠습니다"란 마지막 구절을 눌러썼다.
안재성 작가의 <1902~1905 이관술>이 나온 이후 손옥희의 발걸음은 더 바빠졌다. 그는 할아버지의 조그만 행적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어디든지 갔다. 심산 김창숙 선생의 며느리이면서 이관술이 동덕여고에 다닐 수 있도록 배려해준 손응교를 성주 대가면 사도실마을을 찾아가 만났다. 거기서 수배중인 이관술이 "대구경찰서 앞에서 (일경의 동태를 살피려) 구두닦이를 했다"라는 회고를 들었다. 또 손응교는 이관술이 대전 골령골에서 7월 초순에 학살되었다는 사실도 알려주었다. 그전에는 돌아가신 날을 몰라 생신날인 4월 26일을 기일로 해서 제사를 모셔오던 터였다.
또 박헌영의 아들로 평택의 만기사 주지였던 원경 스님을 만났다. 그는 회고록에서 이관술, 그의 누이 이순금과 경성콤그룹사람 손에 컸다고 회고를 한 바 있다.
나아가 1기 진화위에 진실규명을 요청했고 손해배상소송까지 진행했다. 그래도 해결되지 않는 건 '위조지폐' 사건의 주모자란 누명, '위조지폐' 사건이 날조되었음을 밝히는 문제였다. 사실 이는 손옥희로서 엄두가 안 나는 문제였다.
정판사 사건은 미군정이 날조
▲ 이관술의 손녀딸 손옥희 이관술의 유적비 앞에서 ⓒ 민병래
반갑게도 2015년, 한국외대의 임성욱이 박사 논문으로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를 썼고 여기서 정판사 사건이 미군정에 의해 날조된 사건임을 학문적으로 밝혔다. 임성욱은 많은 자료를 모으고 오랜 시간에 걸쳐 이를 분석했다. 미군정이 '위조지폐' 사건을 조작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안이 중대하고 학술발표라고 해도 적잖은 위험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임성욱은 많은 모순이 있지만 특히 두 가지 점을 들어 사건이 날조되었다고 주장했다. 우선 그는 검사가 공소장에 총 6회의 범행 중 1회차의 날짜를 특정하지 못하고 10월 하순이라고 두리뭉실하게 적은 점을 꼽았다. 이관술과 공범으로 지목된 사람들이 본정서(지금의 중부경찰서)에 끌려가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악질경찰 노릇을 한 현을성 경위 등에게 고문받고 불법으로 감금된 상태에서 조서가 꾸며졌으나 형사소송의 기본원칙도 지키지 못한 것이다.
임성욱은 두 번째로 1200만 원이란 위조지폐가 지금으로 치면 수백 억에 해당하는 엄청난 액수인데 미사용이건 사용된 것이건 단 한 장의 위조지폐도 증거로 제출하지 못한 점을 들었다. 공판에서 제시된 33장의 위조지폐는 조선은행에서 보관하고 있던 별개의 위조지폐여서 직접 증거가 안 되고 그 외 인쇄기, 종이, 잉크는 통상 인쇄소에서 보관하고 있는 것이어서 증거 가치가 없다고 평가했다. 위조지폐를 찍는데 꼭 있어야 하는 인쇄동판조차 공판에 제출되지 않았으니 결국 직접 증거가 하나도 없는 기소였다는 것이다.
미군정 공보부가 1946년 5월 15일 조선공산당이 위조지폐를 찍었고 이관술과 해방일보사의 사장 권오직이 주모자라고 발표하자 조선공산당은 즉각 반박 성명을 냈다. 박헌영은 항의를 하러 하지 중장을 찾아갔고 이관술과 권오직도 성명을 내 "이 사건은 전면적인 허위"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1946년 7월부터 11월까지 열린 재판 과정은 석연치 않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변호인들이 항의한 것처럼 4000쪽이 넘는 사건 기록을 검토할 시간도 주지 않고 기소한 지 열흘 만에 무리하게 공판을 개시한 점이다. 또 피의자 홍계훈은 법정에서 "취조관 여덟명이 팔다리를 포박하고 둘러앉아 걸레로 입을 틀어막고 물을 코에 부었다"라고 고문 사실을 폭로했다. 심지어는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제1회 공판일에 법원 앞에 있다가 체포된 전사옥 같은 사람도 전기고문을 당했고 석방될 때는 거의 폐인 상태로 나왔다.
그럼에도 피의자들이 밝힌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이라는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친일인명사전>에 올라있는 당시의 주심판사 양원일은 공소장에서 적시한 것과 달리 제1차 위폐 인쇄가 있었다는 10월 하순에 이관술이 평양에 갔었다며 동행인을 증인으로 신청하고, 또 박낙종이 부산에 다녀온 증거를 내놓자 검사와 함께 이관술과 박낙종의 증거를 깨기 위한 자료를 수집하러 다녔다. 공정해야 할 판사가 피고를 공격하기 위한 자료를 수집하러 다닌 것이다.
이 재판은 구형량 그대로 선고가 이뤄졌는데 당시 2심제하에서 피고인들의 상고는 기각이 되어 상고심에서 공소장의 여러 허점이 아예 다퉈지지도 못하고 종결되었다.
▲ 골령골에서 학살된 주검 대전형무소에서 복역중이던 이관술도 여기서 불법 처형되었다.
기밀해제된 1947년 8월 13일 자 미군정사령관 문서에는 "재판 과정에서 법원 연락장교와 한국인 직원들이 긴밀하게 협조하여 처리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처럼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은 미군정이 경성법원을 주의 깊게 통제하면서 진행되었다. 미군정은 당시 사건의 배당은 물론 재판 결과까지 뒤집을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결국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은 제1차 미소공위가 결렬되고 쌀값을 비롯한 생활 물가 폭등으로 미군정에 대해서 조선 민중이 등을 돌리자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미군정이 날조했다는 게 임성욱의 분석이었다. 미군정의 의도대로, 가뜩이나 찬탁으로 오인받아 정치적 타격을 입은 조선공산당은 "위조지폐를 찍어 경제를 망쳤다"는 미군정과 친일세력의 대대적인 공세에 심각한 타격을 입고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손옥희는 논문을 접하고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그 논문 한 편은 씻김굿과 같았다. 실제 할아버지는 '위조지폐' 사건의 주모자로 수배를 당했을 때 조선공산당 일각에서 북으로 피신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으나 도망 가면 오히려 날조를 도와주는 격이라며 당당히 맞서겠다고 했다. 또 할아버지는 1946년 5월 4일부터 조선정판사 사장 박낙종과 서무과장 송언필 등이 본정서 형사대에게 잡혀갔을 때 항의하러 조선 제1관구경찰청장 장택상을 찾아가기까지 했다. (장택상이 자리를 비워 못 만났지만) 이관술이 위조지폐를 정말로 지시한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자신이 신념을 갖고 공산주의 운동을 한 것은 좋다. 미군정하에서도 조선공산당은 합법적인 지위를 일정 시기까지는 갖고 있었으니. 그런데 '위조지폐'를 만든 사기꾼이고 경제사범이라는 허물은 큰 굴레였다. 임성욱 교수의 연구로 이를 벗을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으니 손옥희로서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이 논문은 2019년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연구>(신서원)라는 묵직한 단행본으로도 나왔다. 이에 대해 어떠한 반대 논문이나 주장도 나오지 않고 있어 역사학계에서는 이 연구가 점차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고향 울산에서도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2013년부터 손옥희는 배성동이나 배문석 같은 지역의 향토사학자, 노동운동가 등과 머리를 맞대고 이관술기념사업회 결성을 추진했다. 임성욱의 논문이 나오니 활동은 더 탄력을 받았다. 마침내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2019년 4월 당시 김종훈 국회의원(현 울산동구청장)과 박재동 만화가를 자문위원으로, 배성동 작가를 공동대표로 하여 이관술기념사업회가 출범했다.
발족을 기념하여 세미나 '항일운동가 이관술'이 2019년 5월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렸다. 2023년 6월 29일에는 성균관대의 임경석 교수가 제안하고 동아시아역사연구소가 주최한 '이관술과 그의 시대'라는 학술회의도 열렸다.
이제 남은 문제는 진화위를 통해 진실규명을 하고 재심을 통해 무죄를 받아내는 것이다. 물론 보훈처를 통해 서훈을 받는 일도 다시 추진해야 한다.
▲ 성균관대에서 열린 '이관술과 그의 시대' 학술회의사진 성대 동아시아 연구소가 주최한 이 대회는 뜨거운 열기속에서 진행되었다. ⓒ 민병래
할아버지 신원을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
손옥희는 2022년 7월 6일 2기 진화위에 항일운동과 위조지폐 사건 두 가지에 대한 진실규명을 요청했다. 다행히 조사1국에선 할아버지의 '독립운동 사실'에 대해 조사개시가 결정되었고 조사관도 다녀갔다. 그런데 조사2국에 들어가 있는 '위조지폐진실규명의 건'은 아직 감감무소식이다. 보통 신청하면 3개월 내 각하나 조사 개시를 결정해야 하는데 신청한 지가 벌써 1년이 넘었다. 워낙 사안이 중대하고 현재 진화위에 쌓여있는 진실규명 요청이 2만 건이 넘는 상태이니 결정이 쉽지 않을 테지만 시간이 갈수록 안타깝다. 2기 진화위의 활동 시한이 2024년임을 감안하면 더 조바심이 난다.
손옥희는 호소문의 마지막 문장을 놓고 고심하다가 "단 한 분이라도 소식 주시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란 구절을 적고 호소문 작성을 마쳤다. 이 호소문이 울림이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비록 판결문 원본은 없지만 할아버지가 경성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법원이 1947년에 펴낸 책자 <위폐사건 공판기록>에 판결문 내용이 있고 당시 조선, 동아, 현대일보 등 모든 매체에서 수많은 보도가 쏟아졌으니 판결문 원본이 존재하냐 아니냐는 부차적인 문제다. 4·3사건의 유가족도 판결문은 없지만 감옥의 수형인 명부 등으로 판결 자체가 있었다고 전제하고 명예회복과 피해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았던가.
새근새근 잠들어있는 손주를 보며 손옥희는 1931년 반제동맹사건으로 구속되어서 찍힌 할아버지의 사진을 꺼내보았다. 할아버지는 동덕여고보 선생답게 식민지 교육 철폐를 외치고 교내에 경찰이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는 활동을 하다 체포되었다. 일본 경찰에 치도곤을 당한 탓인가 맑은 얼굴엔 어딘가 피곤하고 두려움이 깃들어 있다. 그러나 참나무처럼 단단한 의지 또한 느껴진다.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까지 치면 할아버지는 세 번 구속되었다. 경성콤그룹으로 구속되었을 때까지 할아버지는 희망을 놓치 않았을 것이다. 몸은 힘들어도 민족해방에 대한 결연한 의지는 꺾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일제가 물러간 조국에서 그것도 1년이 채 안 되어 감옥에 갇힐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으리라. 무기징역을 받고 어느 날 골령골에서 뒷머리에 총을 맞으리라곤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 이관술이 1933년 체포되어 찍힌 사진 항일운동가의 기상이 보인다. ⓒ 손옥희제공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날 할아버지의 마음 언저리는 어땠을까? 허허로웠을 게다. 고향 입암마을의 대숲에서 불어오는 바람, 태화강 맑은 물에서 뛰놀던 어린 시절이 그리웠으리라, 심용현 무리가 이끄는 헌병대의 총소리가 울렸을 때 할아버지의 눈에는 무엇이 어렸을까? 아내 박가야, 다섯 딸의 얼굴, 동덕여고보의 제자이며 동지인 이효정, 박진홍, 이순금이 아니었을까?
'조선 민족 만세'를 외치고 구덩이에 처박힐 때 떠오른 얼굴은 1942년 옥중에서 죽은 이재유였을 게다. 1934년에 만나 경성재건그룹을 함께 준비하던 필생의 동지, 피신 중에 눈 가득한 산골로 접어들게 되자 얼어죽을까 봐 서로의 몸을 비벼주던 이재유였으리라.
손옥희는 물끄러미 바라보던 할아버지의 사진을 거두었다. 내일 토요일은 포항에 내려간다. 주말에는 입암마을에 들러 할아버지의 유적비에 하얀 국화꽃을 올려야겠다.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재심 법정에 올릴 수 있다면 더 바람이 없다. 그게 할아버지 신원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일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