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88세의 박종린대장암 투병 중인 그의 집에서
민병래
두번의 무기징역 선고
"박종린을 무기징역에 처한다. 나머지 박선철, 임영찬 무죄, 박호련도 그간 대한민국에 세운 공로를 참작, 무죄를 선고한다."
1960년 10월 28일 서울고법 형사4부 재판장 임항절은 선고를 마치자마자 재판장을 빠져나갔다. 나는 판결이 내려지는 순간 얼떨떨했다. 방청석에서 지켜보다 무죄 판결을 받은 이들의 가족은 박수를 치고 기뻐했다. 나의 망책이었던 박호련은 고개를 돌리며 눈길을 피했다. 교도관 두 명이 다가와 내 옆구리에 팔짱을 끼고, 다른 두 명은 앞뒤로 서서 포승줄을 동여매며 수갑을 조였다.
형무소로 돌아와 나는 사건을 되짚어 보았다. 정리가 잘 안 되었다. 어떻게 박호련은 무죄가 되었나? 역공작의 공로를 참작하다니?
나는 59년 남파될 때 소좌 계급으로 911통신부대에서 일했다. 이 부대는 53년 정전 후에 모든 통신관련부서들을 모아 만든 조직이었다. 나는 여기서 통일사업일꾼들에게 모르스 부호나 난수표 등을 교육시켰다.
당시 48살의 군당 조직부장 한 명이 파견을 앞두고 교육중이었는데 난수표를 힘들어 했다. 접선 날짜가 다가와도 교육에 진전이 없자 나는 책임감을 느껴 "남쪽에 대신 다녀오겠다"고 상부에 제안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방학세 내무상이 나를 호출해, "나서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는 해방 전 소련정보기관 간부였고 정권 수립 시 내무국 정보처장을 맡았던 인물이다.
나는 오백룡 정보호위국장에게도 자문을 구했는데 그도 역시 반대하며 '교관' 업무에만 충실하라고 했다. 오백룡은 동북항일연군에서 (경위련 연장으로) 보천보전투에 참가했고 1945년 8월 9일 88여단과 함께 함경북도 웅기에 상륙하는 등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이런 경력 덕에 조선인민군 8사단장을 맡았고 나중에는 당 중앙위원까지 되었다.
1950년 전쟁 당시 나는 18살로 만경대혁명학원 3학년이었다. 학교 방침을 무시하고 친구들과 뛰쳐나갔다. 나는 8사단이 있던 강릉으로 가서 오백룡 사단장의 호위부대에 들어갔다. 그 인연으로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그에게 의견을 묻곤 했다.
내가 대리파견되는 데에는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이라는 점도 걸림돌이었다. 만경대혁명학원은 항일운동열사의 자녀를 위해서 세워진 학교였다. 1947년 10월12일 평안남도 대성군에 세워져 처음 명칭은 '평양 혁명자 유가족 학원'이었다. 1948년 평양 만경대에 교사를 신축 이전하면서 이름이 만경대혁명학원으로 바뀌게 된다.
나의 아버지는 조국 광복회에서 항일투쟁을 하다 연길감옥에서 7년간이나 옥살이를 했다. 그때 얻은 병으로 해방후 3개월이 되었을 때 숨지셨다. 아버지의 투쟁경력 덕에 나도 만경대학원에 들어갔고 2회 졸업생 격인 내가 직접 연락원으로 나가는 걸 주변에서는 반기지 않았다.
그렇지만 접선 날짜는 다가오고 다른 요원을 보내기가 여의치 않아 결국 내가 내려가기로 결정됐다. 내가 만날 남쪽의 선은 박호련, 그는 방학세 내무상이 직접 관리하는 인물이었다. 함북 길주가 고향인 그는 해방되는 날에 입당해서 38보위부 정보과장을 맡았다. 그는 휘하의 임영찬이 배신해서 남쪽으로 내려가자, 문책을 받고 평양감옥에 갇혔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남쪽 군대가 올라왔을 때 미군은 그의 활용가치가 높을 것으로 보고 대북정보요원으로 포섭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박호련은 이런 가능성을 내다보고 방학세 내무상이 위장으로 투옥을 시킨 것이었다. 그는 정전 후에 중령이 되어 특무대, 첩보부대, 미정보기관에서 대북첩보업무를 수행했다. 북에서는 박호련의 위치를 뒷받침하기 위해 적당한 때 적당한 정보를 대주었다.
내가 내려간 루트는 강원도 양구 문등리의 전방 GP, 북으로 파견된 요원이 귀환하는 형식이었다. 전방 수색대가 나를 박호련에게 인계를 했고 나는 그의 짚차를 타고 서울 장충동 안전가옥으로 가서 은신했다. 3개월 기한으로 왔는데 북쪽 요원 훈련이 지지부진해 다시 3개월 연장되었다. 귀환 전날 무전기를 켜니 뜻밖에도 얼마 안 남은 (1960년) 정부통령 선거결과까지 보고 오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남쪽 체류가 길어지던 59년 12월 어느 날, 장충동 비밀가옥으로 들이닥친 특무대에 의해 나는 연행되었다. 한겨울이었는데 넓은 실내 훈련소가 취조실이었다. 벽난로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었고 쇠꼬챙이 하나가 달아올라 붉은 혀를 낼름대고 있었다. 수사관들은 그 꼬챙이를 들이밀면서 "사실대로 불라"고 윽박질렀다.
취조를 받아보니 이미 사실관계와 조직도가 그려져 있었다. 박호련이 총책이고 그의 수하로 남쪽에 와 중령 계급장을 달았던 임영찬, 그리고 민주당 훈련부장인 박선철 이 세 명이 방학세의 지시에 따라 모란봉간첩단을 만들었고 나는 무전기 2대를 가져와 연락담당을 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거기에 맞춰서 진술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60년 3.15 정부통령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에게 판세가 뒤지자 타개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민주당이 연루된 간첩단 사건으로 반전의 기회를 잡고자 '모란봉'이라 이름을 짓고 민주당 당료들과 의원들을 엮어 나간 것이다.
그런데 특무대의 이 작전에 대해 당시 장도영 육군 정보국장도 "잘못한 일이다. 박호련은 대북첩보라인에서 중요한 인물인데 그렇게 써먹어서는 안 된다"며 직간접적인 불만을 드러냈다. 결국 2심 재판에서 박호련은 대한민국에 공을 많이 세웠다고 무죄 방면이 되었다. 그는 북쪽의 기대와 달리 남쪽에 더 충성하는 이중 스파이였던 것이다.
나는 그 후 1961년 2월18일 대법원 형사부 오필선 재판장으로부터 무기징역 확정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서울형무소에서 대구 교도소로 이감이 되었다.
대구교도소에서는 장기수들이 많았다. 나는 여기서 한 교도관의 도움으로 라디오를 구해 바깥 소식을 청취하고 소내에 전파하면서 '재소자 인권투쟁'을 전개했다. 그런데 라디오가 발각되자 중앙정보부 대구경북지부는 반국가단체와 통신을 시도했다며 '붉은 별'사건이라 작명하여 나와 재소자 몇 명을 묶어 기소했다. 나는 결국 76년에 다시 무기징역을 언도받아 '쌍무기수'가 되었다.
긴 징역으로 나는 건강이 계속 나빠졌다. 전향공작 때 당한 고문 후유증 때문인지 늘 시름시름 앓았다. 93년에 접어들면서는 몸무게가 겨우 40kg이 넘을 정도로 위태로웠다. 그 무렵부터 병보석 얘기가 나왔지만 법무부에서는 바깥에서 받아줄 인수자를 요구했다.
마침 같은 교도소에 있던 전국농민회 배종렬 회장이 무안의 용학교회 임영창 목사에게 연락을 했다. 임 목사는 1989년 평양방문 이래 장기수 구명을 위해 노력하는 문익환 목사의 제자였다. 그 후로도 내 몸 상태가 더욱 악화되자 전향서를 써야 내보내 준다던 대구교도소는 목사가 쓰는 신병 각서로 대신하기로 하고 병보석을 결정했다. 마침내 나는 34년의 징역을 끝내고 93년 12월 24일 대구교도소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