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차이콥스키의 아내> 포스터 이미지

영화 <차이콥스키의 아내> 포스터 이미지 ⓒ ㈜엣나인필름

 
우리는 위대한 예술작품, 고전의 반열에 오른 문화적 유산을 통해 일상의 지루함 혹은 삶의 험난한 고비를 극복하고 초월할 힘을 얻는다. 하다못해 일시적으로나마 그런 주박에서 해방되어 다른 여지를 찾을 수 있는, 말 그대로 숨 쉴 틈을 선사받기도 한다.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믿기 힘든 아름답고 정교한 것, 초월적인 존재들의 위력은 강렬한 체험으로 남곤 한다. 그런 예술적 성취에 경탄하다 보면 대체 어떻게 이런 작업이 가능했을까 문득 궁금해지는 게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런 호기심은 자연스럽게 작품의 탄생 배경과 작업 과정, 궁극적으로는 예술가에 대한 관심으로 귀결된다. 결국엔 그 모든 게 사람이 빚어낸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당연한 수순은 종종 예정된 모순에 봉착하고 만다. 아름답고 숭고한 작품, 희망찬 미래를 예견하는 수많은 명작의 창조자가 자신이 창조한 결실과 전혀 닮아 있지 않거나 극과 극을 달리는 삶을 선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되면, 우리는 대개 애써 인간적 허물을 외면하거나 강변하곤 한다. 그 모순된 상황을 수긍하기란 쉽지 않은 노릇이다. 하지만 그런 필사의 노력은 어느새 진실을 왜곡하거나 떼어낼 수 없는 것들을 강제로 분리해버리고 만다. 결과를 낳은 과정과 주변 배경은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것인데 인위적으로 조작하려드니 본질의 훼손은 피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여러 다양한 욕망과 이해관계에 의해 그런 곡해는 현재진행형으로 곳곳에서 목격된다.
 
특히 국가적 위인이나 민족의 자긍심을 상징하는 이들은 그런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갇혀 박제가 되기 좋은 대상이다. 그런 상징적 존재를 활용해 민족/국가 정체성을 수립해 왔거나 사회를 통합하는 아이콘으로 삼았던 경우 그런 모순이 터지면 곤혹스러운 일이 한둘이 아니긴 할 테지만, 복합적 면모를 지닌 개인을 무 자르듯 좋은 면만 남긴다면 과연 올바른 일일까? 대개 그렇게 실용적으로 착취되는 이들의 위업과 가치는 퇴색하게 마련이다. '박제'란 표현을 괜히 붙이는 게 아니다.
 
<레토>에서 구소련 시절 개혁과 개방을 희구하던 청년세대의 문화적 상징이자 대변자로 존재했던 고려인 록커 빅토르 최와 그의 밴드 '키노'를 영화화했던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은 이번에는 정반대의 시도에 도전한다. 지금 현재도 소련-러시아 문화 정체성에 거대한 지분을 가진, 아니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러시아 출신 음악가의 곤혹스럽기 짝이 없는 가려진 지점을 중심으로 놓은 것이다. 그 대상은 러시아가 자랑하는 음악가 차이콥스키와 그의 아내 안토니나다. 위대한 예술가와 그의 아내 이야기라니,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미래의 관객들은 각자의 상상을 펼칠 테지만, 막상 목격하게 될 작품은 그 상상을 초과하는 충격으로 가득 차 있다.
 
안토니나, 차이콥스키를 만나다... 또는 모든 불행의 시작
 
 영화 <차이콥스키의 아내> 스틸 이미지

영화 <차이콥스키의 아내> 스틸 이미지 ⓒ ㈜엣나인필름

 
이미 드넓은 러시아 전역에 명성을 드높이기 시작한 차이콥스키는 그가 가르치는 음악원에서 9살 연하의 수강생 안토니나를 만난다. 적당히 먹고 살 만한 조건에서 그저 현모양처가 아니라 사회적 성공과 전업 예술가를 꿈꾸던 안토니나는 우상처럼 숭배하던 차이콥스키에게 첫눈에 반하고 만다. 여전히 귀족가문 영애라면 조신한 현모양처로 신부수업을 받는 게 당연시 여겨지던 1870년대 러시아 제국에서 안토니나는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게 아니라 현대 여성 뺨 치게 적극적으로 (요즘 유행어대로라면) '플러팅'에 몰두한다. 음악원 내에서 차이콥스키의 수업 현장을 몰래 관찰하는 것으로 출발해 스승의 주소를 알아내고 구애편지를 보낸다. 떨리는 가슴으로 답장이 오기를 기다리는 안토니나의 표정은 첫사랑에 눈을 뜬 이들의 전형이라 봐도 무방할 테다.
 
하지만 확실히 안토니나의 애정 표현은 좀 극단적인 데가 엿보인다. 편지를 보낸 수고의 결실로 은사는 그의 집을 방문하고 단둘이 있을 기회를 얻자마자 안토니나는 차이콥스키에게 열정적으로 구애한다. 사랑에 빠졌으며 다른 대상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며, 결혼할 것을 여성이 먼저 나서서 요청한다. 곤란한 표정을 짓던 차이콥스키이지만 자신의 구애를 거절한다면 자살해 버릴 것이라며 배수진을 치고 덤비는 안토니나를 차이콥스키 역시 못 이긴 척 받아들인다. 이제 시행착오를 좀 겪긴 해도 행복한 결혼생활의 시작인 걸까?
 
하지만 부푼 꿈에 가득 차 결혼에 골인한 안토니나와 달리 차이콥스키의 표정에는 그늘이 지고 아내에게 감추는 속내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믿기 힘든 사랑의 결실에 세상 모든 행복이 다 자신에게 모여드는 것 같은 안토니나는 하지만 차이콥스키가 그가 지참금으로 가져올 상당한 액수의 돈과 결혼을 통해 가정을 대외적으로 꾸리는 것에 대한 인정을 목적으로 자신의 구애를 받아들였다는 것을 모르진 않는다. 하지만 사랑으로 함께 살다 보면 자신이 소망하던 바를 이룰 수 있을 거라며 애써 불안을 감춘다. 하지만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 법이다. 안토니나의 열망과는 다르게 신혼생활부터 불길한 조짐이 하나 둘 등장한다.
 
부부는 결혼 피로연을 갖지만, 남편의 오랜 친구들에 둘러싸인 안토니나는 곧 이들이 무엇인가를 감춘 채 '인의 장벽'으로 자신과 남편을 차단하고자 하는 노골적 의도를 읽는다. 사실 남편의 지인들은 그런 당황스런 의도를 별로 숨길 생각도 없어 보일 정도다. 대체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걸까? 처음에는 예상했던 것보다 자신이 마련한 지참금이 적어 재정난을 타개하지 못한 실망감 때문인가 넘겨짚어 보지만 그건 조각에 불과하다. 이들은 신혼여행을 가서도 통상적인 부부관계를 갖지 않는다. 차이콥스키가 음악에만 몰두할 뿐, 40이 가까운 적잖은 나이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으니 자신이 적극적으로 성관계를 주도하고자 남편을 유혹했던 안토니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에 경악한다.
 
결국에는 결혼식을 치른 지 불과 석 달도 안 되어 이들의 결혼생활은 사실상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뿐 파국으로 치닫는다. '트로피 와이프'도 아닌데 안토니나는 그저 겉으로만 부부처럼 행세하는 데 만족할 리 없다. 그러나 아내의 그런 속 타는 심정 따위엔 차이콥스키는 무관심할 뿐이다. 그리고 남편이 자신에게 소박을 맞히는 충격적 상황의 진실을 결국 대면하고 만 안토니나의 이후 결혼생활은 끝 간 데 없이 추락을 거듭할 따름이다. 느닷없이 남편의 지인들이 들이닥쳐 이혼을 종용하지만, 안토니나는 오기로라도 이혼을 수용할 수 없다. 결국에 부부는 남보다 못하게 거리를 벌리고 따로 지내지만 여전히 그들은 공식적으로 신성한 결혼서약을 유지 중인 부부다. 그런 답답한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간다. 이들 부부의 파국은 동시대 가장 위대한 러시아 문학의 경이로운 첫 문장처럼,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해 보이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 (<안나 카레니나>, 1877년, 톨스토이)
 
위대한 러시아 위인의 은폐된 진실과 마주하는 순간
 
 영화 <차이콥스키의 아내> 스틸 이미지

영화 <차이콥스키의 아내> 스틸 이미지 ⓒ ㈜엣나인필름

 
국내에서도 차이콥스키의 음악가로서의 인지도와 평가는 실로 거대한 경지에 올라 있다. 클래식을 잘 모르는 이라도 한 번 들으면 금방 흥얼거릴 정도로 수려한 멜로디와 접근성 덕분에 차이콥스키의 위상은 나날이 높아만 간다. 워낙 다방면에 족적을 남긴 천재 예술가이기에 지금 현재에도 그의 작품은 끊임없이 공연되고 재생되는 중이다.
 
하지만 그런 음악가의 사생활은 은근히 별로 알려진 게 없다. 아마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사례는 평생의 후원자였던 메크 부인과의 플라토닉 러브 정도일 테다. 부유한 미망인이 재능 넘치는 천재 예술가를 물심양면으로 후원한 것은 물론, 10여 년 동안 1200여 통의 서신을 주고받을 정도로 차이콥스키의 음악에 대한 통찰과 교류를 주고받은 사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실제로 거의 대면한 적이 없었기에 수많은 상상과 함께 당시에 흔히 일어나곤 했던 예술가 애인과 귀족 귀부인의 불륜에서도 자유로웠다. 예술가와 후원자의 관계 중 가장 '이상적인 모델'로 구현된 이야기인 셈이다.
 
하지만 그런 메크 부인이 말년에 차이콥스키에 대한 후원을 중단한다. 재정난을 이유로 들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는 게 밝혀진다. 후대의 연구 결과를 보면 차이콥스키의 은밀한 사생활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천재 음악가는 동성애라는 성적지향을 가졌던 것이다. 경건하고 보수적인 정교회 주도의 당시 풍토에서 동성애는 환영받을 수 없는 금단의 영역이었다. 질시의 대상을 넘어 사회적 단죄와 처벌을 겪어야 하던 시절이다. 2020년대 대한민국도 그러할 터인데 19세기 후반의 전제 왕정에선 필연적인 상황이다.
 
그런 차이콥스키의 은폐된 진실이 이 영화를 숨막히게 끌고 가는 추진력으로 작용한다. 차이콥스키의 사생활, 특히 부부관계를 다룬 창작물이 과거에 없진 않았지만 대부분 차이콥스키에게 이런 비밀스러운 면이 있었다는 구조로 일관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차이콥스키의 아내>는 마치 로댕의 연인으로만 알려졌던 또 다른 천재 예술가 카미유 클로델을 주인공으로 한 일련의 영화작업 접근법처럼 차이콥스키의 아내 안토니나 밀류코바를 주역으로 발상의 전환을 감행하기에 이른 것이다. 카미유 클로델이 로댕의 그늘을 벗어나 오늘날 독립적인 여성 예술인의 효시로 상징화된 것처럼, 안토니나에게 주인공 롤을 부여한 결과물은 놀라운 형태와 완성도로 기대에 100% 부응한다.
 
소수자가 또 다른 소수자를 가해하고 억압하는 아이러니
 
 영화 <차이콥스키의 아내> 스틸 이미지

영화 <차이콥스키의 아내> 스틸 이미지 ⓒ ㈜엣나인필름

 
차이콥스키는 안토니나의 저돌적인 구애에 마지못해 응한 것처럼 연기하지만, 실은 그가 겪었던 사회적 차별을 물타기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하려 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끝내 은폐에 실패한 그의 비밀은 주된 후원자와의 결별과 그로 인한 심적 타격으로 이어진다. 그런 차이콥스키가 감당하기 힘든 스트레스는 고스란히 안토니나에게 쏟아졌다는 게 연구자들의 조사 결과로, 그리고 영화의 보기 힘든 지경으로 펼쳐지는 세부적인 묘사로 구현되기에 이른다. 비록 귀족 신분이지만 당시 러시아 내에서 여성이 처한 이등시민으로서의 차별과 제약이 그런 학대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안토니나는 자신의 힘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건 물론 사회적 성공과 명예를 꿈꾸며 음악원의 고가 수업료를 감내하며 배움에 힘써 전도유망하다고 촉망받던 젊은 여성이다. 하지만 그가 경탄한 스승이자 천재 예술가에 대한 욕망은 안토니나의 꿈을 좌절시키고 그의 인생을 밑바닥이 없는 늪으로 추락시킨다. 차이콥스키의 위상이 워낙에 거대했고, 그를 둘러싼 은밀한 취향의 그룹이 러시아 내 유력 귀족 구성원들이었기에 가해졌던 차별인 셈이다.
 
하지만 둘은 끝내 공식적으로 이혼하지 못한다. 고위층 귀족들이 둘의 이혼을 종용하는 데도 불구하고 러시아 사회 깊숙하게 뿌리내린 보수적 결혼관과 이를 뒷받침하는 정교회 교리 때문이다. 둘 중 하나의 귀책사유가 확실해야 이혼을 허락받을 수 있지만 정작 안토니나는 희생양에 불과할 뿐 불륜이나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니고, 차이콥스키는 오히려 아내를 건드리지도 않았다. 남편의 측근들은 처음엔 안토니나의 허물을 물고 늘어지려 하지만 걸려들 게 별로 없자, 이번에는 그에게 차이콥스키가 부정을 저질러 부부관계 유지가 어렵다는 판정에 가담할 것을 종용한다. 그 대가로 평생 생활비를 안정적으로 지급하겠다는 조건이다. 여자 혼자 몸으로 살아가려면 당연히 마음이 동할 법한 유혹이다.
 
그러나 안토니나는 자신이 사랑에 몸을 맡겨 본인의 인생을 나락으로 추락시킨 차이콥스키의 가짜 불륜이 공식화되는 것을 참을 수 없다. 부부 중 누구 하나 결정적 이혼 사유를 못 가져오니 아무리 실질적으론 남보다 못한 사이라 해도 공식 부부라는 타이틀은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를 증오하고 저주하며 이들의 악연은 수십 년 동안 반복된다.

둘 다 막심한 피해를 겪지만, 대외적으론 명성과 지위가 높아지기만 하는 차이콥스키에 비해 사랑도 가정도 다 잃고 삶의 동력을 상실하고 만 안토니나의 이후 삶은 말 그대로 죽지 못해 사는 격이다. 그는 차이콥스키를 계속 원망하고 저주하고 사랑하며 남은 생을 공전한다. 차이콥스키가 콜레라로 급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그리고 본인 역시 이후 20여 년 넘게 더 살아간 여생이 객사로 종료될 때까지 맞이한 운명이다.
 
권위주의 독재와 전쟁으로 치닫는 현재 러시아의 은유
 
 영화 <차이콥스키의 아내> 스틸 이미지

영화 <차이콥스키의 아내> 스틸 이미지 ⓒ ㈜엣나인필름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은 겸업 중인 무대 연출가 실력과 이미 예술적으로 평가를 마친 작가주의적 기법을 총망라해 이 지긋지긋한 애증과 파국의 콜라보 롤러코스터를 잊을 수 없는 몇몇 장면들로 관객들의 뇌리에 새겨넣는다. 우선 놀라운 경지로 재현한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도시 풍경부터 경이로운 완성도를 선보인다. 극단적인 빈부격차와 권위주의적 사회 풍조, 퇴폐적이고 사치향락이 팽배한 상류사회 문화가 직접 관찰하는 체험처럼 화면 가득 수놓는다. 빛의 활용과 색감 조절은 마치 북유럽 르네상스 미술사조처럼 정교한 구도와 명암으로 시선을 사로잡을 정도다. 소품 재연부터 우화적으로 표현된 여러 상징들도 눈에 들어온다.
 
영화를 보고 있자면 감독이 19세기 말 제정러시아의 풍경을 빌려 권력 집단만 교체되었을 뿐 극단적 계급 격차와 부의 편중, 시민의 능동태가 아니라 수동적 신민화 풍조가 두 세기가 지난 현재에도 반복된다는 점을 문득 깨닫게 된다. 내실을 다지고 참여를 이끌기보다 권위주의와 국가 우선을 내세우며 팽창 일변도로 치닫던 제정러시아의 면모, '그레이트 게임'을 타 강대국들과 치르며 속은 썩어가지만 반대하고 비판하면 비밀경찰이 출동하고 시베리아 강제유배가 범람하던 러시아 제국의 실상과 21세기 푸틴의 권위주의 독재 치하 러시아 연방은 얼마나 다를까?
 
21세기 러시아 영화계의 거두 중 일원으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한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은 차이콥스키처럼 속내를 감추길 거부하고 영화를 통해 사회적 발언을 거듭해 나가는 중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가는 감시와 투옥이다.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판하다 강제 구금을 당했던 감독은 국내외 영화인들의 항의에 힘입어 석방된 후 해외에서 체류하고 있다) 전제군주정 하에서 비판적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당했던 역사적인 고초를 굳이 하필 지금 시기에 공들여 완성한 감독의 의도는 현실에 대한 비판과 개입으로 자연스럽게 해석될 수 있겠다.
 
물론 거장 반열에 오른 감독은 일방통행으로 주제와 고민을 전달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 보인다. 안토니나의 복잡한 심경과 그가 처한 상황은 감독의 장기인 초장시간 롱-테이크와 극중 극 형식으로 삽입된 인상적인 연극과 현대무용 장면들, 그리고 1995년생에 불과한 신예 일리오나 미하일로바의 빙의 급인 안토니나 연기로 쉴 틈 없이 현란하게 구현된다. 특히 주연배우가 선보이는 놀라운 몰입력과 점점 폭주하며 파괴되어가는 인간의 초상은 섬뜩하면서도 처연함 그 자체이다. 그렇게 영화 전체를 수놓은 선명한 주제의식은 물론, 혀를 내두르게 할 만한 복합적 장치와 세공이 절묘한 조화를 이뤘기에 '작가주의 예술영화'라면 이 정돈 되어야지 하는 경탄을 저절로 불러일으킨다.
 
'누구의 편이냐?' 진영논리가 불러온 딜레마에 놓인 감독
 
 영화 <차이콥스키의 아내> 스틸 이미지

영화 <차이콥스키의 아내> 스틸 이미지 ⓒ ㈜엣나인필름

 
한 가지 더, 영화가 아무리 세심하게 준비되더라도 온전히 예상하기란 불가능한 영역은 결국 '영화 속 현실'의 바깥에서 일어나는 온갖 변수들이다. 2022년 초 전쟁이 발발한 후 침략자인 러시아의 문화예술 교류는 고립되고 차단된 상태다. 하지만 평소 러시아 체제에 비판을 겁내지 않던 키릴 세레브렌니코프의 신작만이 칸영화제에서 공개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적지 않은 친 우크라이나지지 인사들은 <차이콥스키의 아내> 선정 및 상영과 감독의 인터뷰 등을 불편하게 대했다.
 
이런 논란은 구 소련 지역 영화감독들에게 공통적으로 닥친 문제다. 친서방-우크라이나 독립 입장을 강고하게 견지하는 현재 우크라이나 현역 감독 중 가장 높은 지명도를 지닌 세르게이 로즈니차는 2022년 침공 초기에 세계 유수의 영화제들에 전쟁과 연관된 작업을 연달아 선보이며 예술의 현실 개입 모범사례를 만들기도 했지만, 특이한 행보로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속한 우크라이나 영화인단체에서 탈퇴하면서 러시아가 침략자이지만 그렇다고 과거 러시아 예술의 성취와 고전의 수용을 배제해선 안 된다는 항의를 표했다. 반면에 유럽 영화인단체에 항의하면서 러시아의 침공을 침공이라 선명하게 표기하길 망설이는 기회주의적 태도에 실망과 규탄을 명확히 했다. 세상일에 입장을 정하는 건 무척 고려해야 할 게 많고 때로는 결단이 요구되는 건이다.
 
'차이콥스키가 전쟁을 선동한 것은 아니지 않냐?'며 극단적인 진영논리를 경계하는 목소리는 날로 가혹해지는 전쟁 앞에서 힘을 잃어간다. 실제로 차이콥스키의 부계 혈통은 우크라이나인 데다, 그의 음악적 경향 역시 서유럽의 기술적 형식과 러시아 민족주의 감성에 영향받은 사조를 솜씨 있게 조합했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그렇게 이 영화가 완성된 후 처한 일련의 수난은 예술의 정체성과 성격 논쟁을 촉발하는 데다, 현재 유럽의 갈등상황이 맞물리며 누구도 침묵하거나 모호한 태도로 일관할 수 없게 만든다. 예술과 정치의 경계는 어떻게 구획이 되어야 할 것인가 쟁점은 탁상공론이 아니라 현실의 문제를 통해 답하기 힘든 질문을 던지는 중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이상하게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음악 한 곡이 머릿속을 맴돌기 시작했다. 프로그레시브 록을 상징하는 영국의 대그룹 '핑크 플로이드'의 명반 < The Dark Side of the Moon > 수록곡 'The Great Gig in the Sky'다. 이 노래는 가사랄 게 없다. 객원 보컬 클레어 토리에게 가사나 해설은 일절 없이 즉흥으로 노래를 부르라 요청하자 겁에 질린 보컬이 죽음을 앞둔 사람처럼 목소리 자체를 절규하며 비명 지르는 '소리'로 활용한 명곡이다. 영화 내내 파괴되어 가면서 차이콥스키를 상대하는 안토니나의 섬뜩하지만 슬픈 표정에 그저 배경음악으로 깔아놔도 무리가 없어 보였다. 그만큼 이 영화는 실존인물에 대한 상상을 가미하긴 했지만, 그가 처했던 잔혹한 운명과 그 파국에 대해 어떤 특이점에 도달하고 만 것이다.
 
<작품 정보>
차이콥스키의 아내 Tchaikovsky's Wife
2024│러시아│파격적 멜로드라마
2024.05.01. 개봉│143분│청소년관람불가
감독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출연 일리오나 미하일로바(안토니나 밀류코바 역),
오딘 런드 바이런(표트르 차이콥스키 역).
카티야 에르미시나(샤샤 차이콥스키 역),
마이런 표도로프(니콜라이 루빈스타인 역),
알렉산드르 가르칠린(아나톨리 브라드코프 역),
안드레이 부르콥스키(블라디미르 메체르스키 역),
빅토르 코르니약(피터 유르겐슨 역)
수입/배급 ㈜엣나인필름
 
2022 75회 칸영화제 경쟁 부문 공식 초청
차이콥스키의아내 키릴세레브렌니코프 일리오나미하일로바 오딘런드바이런 레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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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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