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코 피사로는 세계사에 커다란 족적을 세긴 근대의 인물이다. 전성기를 누리던 15세기 스페인 카스티야 왕국 태생으로, 그 시절 카스티야의 야망찬 사내들이 흔히 그러했듯 신대륙으로 건너와 출세와 정복에의 야망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피사로가 역사에 이름을 남긴 건 잉카제국의 정복을 통해서였다. 남아메리카의 대제국을 굴복시키고 이전까지의 소위 대항해시대를 이후 수백 년간 이어진 식민지시대로 전환시켰던 것이다.
 
15-16세기의 카스티야, 심지어 전 유럽이라고 해봐야 세계 역사의 변방에 지나지 않았다. 명나라는 만력제의 등장 이후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으나 군사와 경제, 기술 등 여러 부문에서 세계 최강이라 해도 손색이 없었다. 악바르 대제로부터 샤 자한 황제로 이어지는 무굴제국의 전성기는 쇠락한 명나라에 비해 생산력과 군사력에서 우위를 점한다 평가될 정도였다.
 
유럽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오스만 제국 또한 마찬가지다. 제국 600년 역사상 가장 강대했던 시기가 바로 16세기라 해도 좋을 정도다. 제국의 영토가 오늘날 시리아와 이집트, 북아프리카 일대에 이르렀고 유럽 연합함대에게 레판토 해전에서 패하기까지 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할 만큼 강성함을 자랑했다.
 
아귀레 신의 분노 포스터

▲ 아귀레 신의 분노 포스터 ⓒ 백두대간

 
탐욕인가, 열정인가... 피사로의 엘도라도 원정대
 
그러나 피사로 이후 역사는 크게 뒤바뀐다. 야욕으로 가득찬 정복자들과 함께 떠난 남아메리카 탐험과 정복은 마침내 잉카제국에 닿아 그들을 굴복시키고 대 식민시대를 열게 되는 것이다. 이로부터 앞서 열거한 명나라와 청나라의 중화제국과 무굴제국, 오스만제국을 낙후된 변방이던 유럽이 압도하니 오늘의 세계사가 여기서 큰 가지를 뻗었다 해도 틀리지는 않을 테다.
 
<아귀레 신의 분노>는 1560년 엘도라도를 찾아 떠난 피사로 원정대의 이야기를 다룬다. 여기서 피사로는 앞에 적은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아닌 그의 이복동생 곤살로 피사로다. 곤살로는 20대 초반에 동행한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잉카정벌에서 공을 세우며 정복자로 크게 성공했고, 약탈을 통해 얻은 부로 당대 전 유럽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된다. 특히 대신들이 보는 앞에서 잉카제국 황제에게 오줌을 갈기고, 황후를 추행했으며, 수많은 잉카인을 학살하는 일까지 자행해 악명이 자자했다.
 
곤살로는 잉카제국을 약탈해 얻은 재화로 당대 스페인은 물론 전 유럽에서도 손꼽는 부를 쌓는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카를로스 1세가 파견한 총독을 살해하고 스스로 페루총독에 오를 만큼 안하무인의 행태를 거듭한다. 생전 곤살로 피사로가 자행한 무모한 행동이야 끝이 없지만, 그중 유명한 실책 하나를 꼽자면 역시 엘도라도 탐사를 들 수 있겠다. 오늘날 전설로 밝혀진 엘도라도의 존재를 그는 실제로 믿었고 수차례 탐험에 나섰던 것이다.
 
아귀레 신의 분노 스틸컷

▲ 아귀레 신의 분노 스틸컷 ⓒ 백두대간

 
40인의 선발대... 아귀레의 반란
 
영화는 실제로는 곤살로가 반란 끝에 붙들려 처형된 뒤인 1560년을 배경으로 한다. 영화에서 곤살로는 아직 살아 그 위세가 대단한 상태다. 그는 수백의 탐험대를 꾸려 밀림을 통해 진군하지만, 험난한 지형과 수시로 닥쳐오는 위협 앞에 좀처럼 전진하지 못한다. 탐험대의 구성은 스페인 병사들과 기독교 신부, 젊은 스페인 여성 두 명, 통역이며 짐꾼 역할을 맡는 현지 노예들,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노예로 꾸려진다.
 
온갖 어려움 가운데 식량이 떨어져가자 곤살로는 결단을 내린다. 본대를 움직이는 대신 소수의 선발대를 꾸려 앞질러 보내자는 것이다. 곤살로는 선발대를 이끄는 대장으로 우루수아(루이 구에라 분)를 임명하고, 그에게 경험 많은 부하 아귀레(클라우스 킨스키 분)를 주어 일단의 대원들을 지휘하도록 한다. 기독교 신부와 우루수아의 아내, 아귀레의 딸까지 동행하는 원정대는 세 개의 뗏목에 나눠타고 탐험을 시작한다.
 
곤살로에게 부여받은 시간은 1주일이다. 복귀까지 감안하면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탐험은 시작부터 험난하다. 첫날부터 뗏목 하나가 소용돌이에 휘말려 빠져나오지 못하고 거기에 탄 대원들을 모두 잃어버린다. 심지어 아귀레가 우루수아의 명령을 듣지 않고 독단적으로 행동하며 선발대가 따로 노는 모습까지 공공연히 발견된다. 나흘이 지나서까지 엘도라도는커녕 사람이 사는 마을을 발견하지 못한 우루수아는 복귀를 결정하려 한다. 그리고 아귀레가 반란을 일으킨다.
 
아귀레 신의 분노 스틸컷

▲ 아귀레 신의 분노 스틸컷 ⓒ 백두대간

 
불복종과 반란... 그 시절 정복자의 민낯
 
아귀레는 우루수아를 총으로 쏘아 쓰러뜨리고 그를 따르는 부관을 감금한다. 다른 대원들도 감히 저항할 수 없도록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는 건 물론이다. 아귀레는 선발대를 이끌고 복귀하는 대신 전진하기를 선택한다. 코르테스가 아즈텍을, 피사로가 잉카를 정복해 엄청난 부와 명예를 얻은 것처럼, 아귀레는 엘도라도의 정복자가 되기를 꿈꾼다.
 
영화가 담고 있는 아귀레의 모습은 기실 카스티야, 나아가 유럽 식민주의자들의 일면을 압축해놓은 것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피사로의 잉카제국 정벌 또한 아귀레의 반란과 얼마 다르지 않게 이루어졌다. 국왕에게 임명된 파나마 총독이 원정을 그만두고 복귀하라 명령했지만 그는 명에 따르지 않았다. 그 결과가 카스티야 왕국 역사상 가장 잔학한 약탈로, 또 가장 큰 식민지를 얻는 결과로 이어졌다. 피사로를 포함해 명령을 거부한 13명의 대원은 전설로 남았다.
 
반란 또한 빼놓을 수 없다. 프란시스코의 동생 곤살로는 왕이 보낸 총독을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계속된 탐험과 정복에의 야욕을 드러냈다. 제국주의자의 지도엔 여전히 미지의 땅이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빼앗을 땅과 재물이, 강간할 여자가, 노예로 삼을 인간들이, 제압하고 죽여 버릴 원주민이 있는 것이었다. 빼앗는 건 채 20%가 되지 않는 국왕에의 세금을 제하고 죄다 '콩키스타도르'라 불리운 정복자들의 것이 되었다.
 
아귀레 신의 분노 스틸컷

▲ 아귀레 신의 분노 스틸컷 ⓒ 백두대간

 
천박한 욕망에 빚진 문명... 우리는 자유로운가
 
탐욕을 극대화하는 체제, 역사를 아는 이들은 변방이었던 서유럽이 당대 강력한 제국에 앞서서 미지의 문명을 발견하고 제압해나간 이유를 여기서 찾는다. 곤살로에 대한 아귀레의 반란, 엘도라도를 향한 전진, 그 과정에서 일어난 수많은 사건들은 그저 실패한 엘도라도 탐험의 복기에 그치지 않는다. 오늘의 문명이 있기까지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어쩌면 오늘날 우리 문명의 저변에 깔려 있는 탐욕의 적나라한 일면을 아귀레의 모습으로부터 드러내는 것은 아닌가.
 
<아귀레 신의 분노>를 연출한 베르너 헤어조크는 영화를 엘도라도 탐험에서 선발대로 보내졌다가 유일하게 살아남은 신부의 기록을 바탕으로 제작했다고 말한다. 그가 남긴 일기를 중심으로 영화를 찍었다는 이야기다. 아귀레의 실패한 탐험으로부터 헤어조크가 말하고자 한 건 무엇이었을까. 실패한 아귀레와 성공한 코르테스, 피사로의 차이는 무엇일까. 오늘 인류문명이 이룩한 성취와 이들의 정복 사이를 잇는 끈은 과연 없는 것일까.
 
'신은 언제나 강한 자의 편'이라던 신부의 말과 채 마흔 명도 되지 않는 선발대에서 국왕으로 추대된 이의 우스꽝스런 모습, 측량해 얻은 지도를 보며 스페인보다 넓은 땅을 얻었다고 웃던 못난 왕의 말을 떠올린다. 오늘날 우리의 걸음이 후대의 시선에서 이처럼 우스꽝스럽지 않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아귀레, 신의 분노>가 그린 천박한 욕망들로부터 모든 부가 넘쳐나는 오늘 내 주변을 생각하게 되는 건 이 영화에 제법 훌륭한 구석이 있기 때문일 테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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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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