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아들과 관련된 폭행사건에 직접 뛰어들어 '조폭영화'를 찍어버린 어느 재벌 회장님을 둘러싼 공방은 일단 경찰서 유치장에 들어가는 것으로 한 고비를 넘겼습니다. 겉보기에는 여론 공세에 밀려 마지못해 들어간 것처럼 보이지만 수면 아래에서는 이름만 들으면 바로 아는 국내 최대의 '로펌'이 나서 치열한 법리공방을 주도했습니다. 그동안 혐의를 딱 잡아떼던 회장님이 영장 실질심사를 받으러 나와서는 증거 인멸 우려가 없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일부 혐의를 시인한 것이나, 피의 사실 공표 혐의로 담당 경찰관을 고소하여 압박을 가하고, 상대방에 대한 정보를 시차를 두고 언론에 흘리는 등 예사롭지 않은 프로 솜씨를 보였습니다. 굵직굵직한 인수합병만 다루는 것으로 알고 있는 이 알 만한 로펌은 재벌이나 고위 공직자에 한해서 형사 사건이나 개인 대 개인 사건도 맡는다고 합니다.
 이보다 더 좋은 직장일 수 없다가도 적으로 돌변하는 순간 처절한 나락으로 빠뜨리는 것이 할리우드에서 로펌이 떠맡는 악역입니다. 대기업이나 마피아와 결탁하는 것은 기본이고 악마가 직접 로펌을 차리기도 합니다.
ⓒ Paramount 외

<로펌>이라는 국내 TV 드라마도 있었지만 아직 이 단어는 우리 입에 잘 달라붙지는 않습니다. 그냥 '로펌'하면 미국식 대규모 법률회사를 지칭한다 해도 과언은 아니며 미국식 로펌들은 미국의 시장 개방 정책을 타고 세계 법률 시장을 미국 방식으로 재편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에겐 '합동법률사무소'나 '법무법인' 같은 단어가 익숙했지만 IMF 이후 부쩍 사용 빈도가 높아진 로펌이라는 단어는 이번 한미 FTA 체결로 대세가 될 듯합니다. 거짓말을 못하는 곤란한 처지에 놓인 변호사가 등장하는 코미디 <라이어 라이어>처럼 원래 미국에는 변호사를 말로 먹고사는 악당 취급하는 정서가 있는 모양입니다. 법정이 등장하는 영화가 많은 할리우드에서 로펌들 역시 악역을 마다하지는 않습니다. 악마 같은 변호사가 아니라 아예 악마가 변호사로 등장하는 <데블스 에드버킷> 같은 영화도 있으니 말입니다. 로펌이 악역으로 등장하는 영화들은 크게 두 가지 패턴이 있습니다. 하나는 '여당입당'(?)으로 <야망의 함정>처럼 촉망받는 젊은 변호사가 로펌에 발을 들여 출세 길을 걷다가 로펌의 부도덕과 맞닥뜨리는 내용입니다. 젊은 변호사는 살기 위해 처절한 생존 투쟁을 벌여야 하는데 <야망의 함정>처럼 악당들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도 하고 <데블스 에드버킷>처럼 결국 악마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하기도 합니다. 젊은 변호사가 로펌과 싸우는 또 다른 패턴은 '재야인사'(?)입니다. 명문대도 나오지 못하고 시장 바닥에서 고만고만한 일거리나 받아먹던 삼류 변호사가 일류 대학 출신들로만 구성된 거대 로펌에 맞서 고군분투합니다. <필라델피아>에서 거대 로펌의 촉망받던 변호사는 에이즈로 해고된 뒤 자신을 변호해줄 사람을 찾지 못해 예전엔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소액 민사소송 전문 변호사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Justice has its price’라는 헤드카피를 가진 <시빌 액션>의 셈법에 따르면 법정에서는 불구가 된 원고가 죽은 원고보다 더 잘 팔리고, 여자보단 남자가, 흑인보단 백인이 더 잘 팔린다고 합니다.
ⓒ Touchstone

제목 자체가 '민사소송'인 영화 <시빌 액션>은 합의금을 노리고 민사 소송을 부추기던 싸구려 변호사가 거대 기업에 맞서 환경 관련 소송을 벌이는 구도로 시작합니다. 어느 시골 마을에 갑자기 백혈병 환자가 늘어나고 그 원인이 되는 공장이 대기업 계열사인 것을 알게 된 변호사는 대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주도합니다. 대기업은 로펌을 내세워 협상에 들어가고 이내 만족스런 가격에 접근하게 됩니다. 하지만 흥겨운 타협의 순간, 쓸데없는 의협심을 발휘한 변호사는 끝없는 법정 지옥의 나락으로 추락하기 시작합니다. <시빌 액션>은 소송 천국 미국 법정의 실상을 잘 보여주는 영화로 알려져 왔습니다. 이 영화의 원작 역시 같은 제목의 논픽션으로 미국 법체계를 이해하는 좋은 기회를 제공합니다. 하지만 로펌은 그 스스로를 위해 존재하지 않으며 누군가를 대변하는 존재입니다. 로펌이 필사적으로 대변하는 존재는 미국이라면 대기업 또는 독점기업일 테고 한국이라면 재벌일 것입니다. 영화 <시빌 액션>에서 대기업은 그 실체가 감춰져 있고 로펌들의 대결만 묘사되고 있지만 그 행간에는 그들이 대변하는 대기업의 행태를 엿볼 수 있습니다. 거액을 챙기게 된 변호사가 몰락하는 계기는 돈 보다 책임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환경 문제에 대한 대기업의 책임을 명시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교육에 돈을 내라는 요구를 하는 순간 '얼마면 되겠니?'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는 끝장납니다. 거대 로펌의 모든 테크닉이 동원되는 치열한 법정 다툼과 누구 자금이 더 풍족할까 피 말려 죽이기가 시작되고, 뭐가 씌웠는지 정의를 들먹이던 변호사는 결국 파산하고 거리로 내몰립니다.
 대기업을 대변하는 관록의 로펌 변호사는 ‘법정에서 정의를 찾다가는 끝도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라 충고합니다. 돈은 더 줘도 환경 문제에 대한 책임은 질 수 없다는 것이 로펌이 대변하는 자본의 분명한 입장입니다.
ⓒ Touchstone

차라리 돈은 더 줄 수 있지만 명분과 책임은 결코 줄 수 없다는 것이 로펌이 대변하는 자본의 입장입니다. 특히 노조, 환경, 인권 같은 단어에는 알레르기를 일으키죠. 돈은 줘도 책임은 질 수 없다는 <시빌 액션>의 대기업은 우리나라 노사협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임금은 올려줘도 노조는 안돼'를 떠올리게 합니다. 세계에서 한국을 대표한다는 우리나라 어느 대기업(또는 재벌)이 '노조가 없다'는 것을 자랑하고 그걸 지키기 위해 돈과 온갖 무리수를 마다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지난 한미FTA 협상 과정에서 우리 협상단은 미국 로펌과 계약을 맺고 협상 기간 내내 이들의 자문을 받으며 협상에 임했습니다. 로펌 시장 개방까지 다뤘던 이번 협상에서 미국 로펌의 도움이 절실했던 것 자체가 세계 법률시장에서 미국 로펌이 차지하는 역할을 가늠하게 합니다. 미국 로펌은 이미 우리 사회 깊숙이 들어와 있지만 정작 우리의 사법 개혁은 지지부진하고 국내 최대 로펌은 주먹 휘두른 회장님 뒷감당에 바쁩니다. 모쪼록 할리우드 영화 속 악당 로펌들은 극장에서만 만나고 대한민국 현실에서 맞닥뜨릴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만.
 합의금을 향해 순조롭게 나아가던 민사소송 전문 변호사는 정의를 내세운 댓가로 파산합니다. <시빌 액션>의 실제 주인공 잭 슐릭먼 변호사는 끈질긴 법정투쟁 끝에 문제의 공장을 폐쇄시키고 뉴잉글랜드 주 역사상 가장 값비싼 환경정화 프로젝트를 성사시킵니다.
ⓒ Touchstone

덧붙이는 글 장익준 시민기자는 토클(TOKL, 국어능력인증시험)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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