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대전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 기록 사진.
미국립문서보관소
이종구(가명) 신탄진 대한청년단장은 관내 가가호호를 방문하느라 정신이 없다. '이제 스무 집 받았네' 여러 사람이 나눠서 진정서를 받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는 대한청년단장이라는 감투가 무색하지 않으려면 남들보다 많이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점심도 거르고 도장을 받으러 다녔다.
"문식이 있는가?"
"단장님 오셨슈. 어쩐 일이래유?"
"진정서에 도장받으러 왔네."
"아! 명섭씨 일인가유? 징역 15년을 받았다는 게 사실인가유?"
'그렇다'는 이종구 단장의 말에 조문식(가명)은 선뜻 도장을 찍어 주었다. "단장님 고생 많구만유." "고생은 뭐. 당연히 해야 할 일인 걸. 그럼 쉬게." 조문식의 집에서 나온 이종구 단장은 오후 내내 마을을 다니며 같은 방식으로 도장을 받았다. 하루 종일 받은 도장이 63개였다.
4월 초라 아침저녁으로는 날씨가 서늘했지만, 종일 발품을 파느라 얼굴은 땀으로 번들거렸다. 저녁에 대한청년단 사무실에서 모이기로 했기에 그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 문을 열자 자욱한 담배연기로 앞을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아이고, 너구리 잡는가? 담배 좀 작작들 피게." "제가 아까부터 얘기했는디 콧방귀만 뀌네요." 청년단 부녀부장을 맡고 있는 최점례(가명)가 입을 삐죽거리며 이야기한다.
"자, 모두들 조용하고, 도장 몇 개나 받았는지 점검해 보고 밥이나 먹으러 가세."
20여 명이 마을 별로 나뉘어 도장을 받다보니 그날 하루에만 천 명의 도장을 받았다. "모두들 고생했네. 모레까지 받으면 우리가 목표한 5천명을 달성할 것 같네. 모레까지만 고생하세. 자, 밥 먹으러 가자구." 단장의 말에 모두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무슨 도장을 받길래, 20명이나 동원되어 5일씩이나 동분서주하는가?
식당으로 발길을 향하는 이들은 충남 대덕군 북면(현재의 신탄진)의 내로라하는 유지들이었다. 대한청년단, 독립촉성국민회, 애국부인회 간부들과 신탄진지서 차석 부인 등이었다. 그렇다면 신탄진의 유지들이 생계도 내팽개치고 동분서주하며 받는 진정서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놀랍게도 그 주인공은 전 인민위원장 정명섭이었다. 그는 북한군이 점령하던 인공시절 북면(신탄진) 인민위원장을 했다는 이유로 부역죄가 적용되어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상태였다.
이념이 갈라치지 못한 사람들
정명섭은 한국전쟁 발발 후 북한군이 충남지역을 통치하면서 충남 대덕군 북면 인민위원장이라는 감투를 쓰게 되었다. 현재로 따지자면 면장이다. 인공 시절 인민위원장 감투는 막강한 것이었다. 모든 행정업무를 인민위원장 책임하에 진행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북한군의 지휘를 받던 치안대가 관내 우익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소위 '반동인사' 검거였다. 검거대상 1호는 군·경 가족과 우익청년단 간부였다. 반동인사 검거는 신탄진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전국에서 동시에 실시되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예외는 없었다.
각 읍·면별로 군·경 가족과 우익단체 간부들이 연행되어 지서에 구금되었다. 이들은 즉시 관내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충남의 경우 각 경찰서에 연행된 이들이 대전형무소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1950년 9월 25일~26일 형무소 안의 우물을 포함한 여러 곳에서 약 1500여 명이 학살되었다.
신탄진지서(북면지서)에 구금된 이들이 위와 같은 코스를 밟는 건 뻔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들에게 구세주 같은 인물이 나타났다.
"소장님, 이 양반들은 아무런 죄가 없시유. 누구를 해꼬지한 적도 없고, 주민들에게 민폐를 끼친 적도 없구만유. 제 이름을 걸고 맹세하겄시유."
이렇게 사정을 한 이는 다름 아닌 인민위원장 정명섭이었다. 인민위원장이 사정을 하자 분주소장(현재의 파출소장)은 난처했다. 자기 이름을 걸고 사정하니 석방시키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인민위원장 정명섭이 누구인가? 혁명가의 유가족 아닌가.
선순환의 시작
북한군이 신탄진을 점령한 1950년 7월 말, 인민군은 행정조직을 복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당연히 면인민위원회를 설치하고 위원장을 선임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런데 인민위원장 자리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혁명가의 유가족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군이 신탄진에 와서 지역 정보를 수집하다 보니, 충남 대덕군 북면 평촌리 출신의 정천섭이 한국전쟁 직후 대전 산내에서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학살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정천섭은 정명섭의 둘째 동생이었다.
정천섭은 서울대학교생으로 해방 이후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가 1948년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6.25가 발발하자 대한민국 군경은 대전형무소에 구금되어 있던 재소자들과 예비검속한 보도연맹원들을 산내에서 집단 처형했다. 이 와중에 정천섭도 불귀의 객이 되었다.
국민보도연맹원은 좌익활동가들이 전향해 대한민국에 충성을 서약한 관제반공단체 회원들이었다. 하지만 정천섭을 비롯한 형무소 사상범들은 알짜배기 사회주의자들이었다. 북한군 입장에서 보면 보도연맹원들은 배신주의자, 기회주의자들이고, 정천섭은 혁명가였다.
그러니 정천섭의 유가족은 인공 시절 북한군에게 대우를 받을 수 있었고, 정천섭의 형 정명섭이 인민위원장이 된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런 정명섭이 우익인사들을 풀어주자고 강력히 요청하니, 분주소장은 울며 겨자 먹기로 우익인사들을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분주소장은 할 수 없이 유치장에 구금되었던 군·경 가족과 우익단체 간부 십여 명을 석방시켜 주었다. 지옥에서 천당으로 향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