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진, 목죽도, 1930년대
황정수
미술여행을 끝내고 1917년 경 부인과 아들을 서울로 올라오게 하여 자리를 잡는다. 그는 서울에 처음 올라와 종로통에 살다가 연지동으로 이사를 간다. 그는 서화가로서 활동하며 종로통에 '서화가게'를 차려 생업을 꾸린다.
김진우의 미술 학습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보통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1868-1933)에게 사군자를 배웠고, 1918년 김규진이 개설한 '서화연구회' 제1회 졸업생이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본인은 '나는 그림 스승이 없다, 감옥에서 스스로 터득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을 근거로 독학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미술이라는 것은 쉽게 혼자 이루어낼 수 없는 것이다.
김규진의 제자들인 이병직(李秉直)이나 이응노(李應魯) 같은 화가들과의 유사성 등을 보더라도 일정 부분 김규진의 지도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단지 다른 제자들과 달리 김진우는 사제 관계라기보다는 김규진과 서로 교류한 것으로 생각하여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중국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강원도 대표 의원을 지냈으며, 1921년 귀국하여 독립운동을 펼치다 붙잡혀 3년 징역형을 살기도 하였다. 감옥에서 나와 훗날 생활이 안정되자 권농동 김은호의 집 뒷집으로 이사 왔다가 다시 원서동으로 이사한다.
그가 결국 북촌 지역으로 옮겨 살게 된 것은 북촌이 여유 있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기도 하지만, 북촌 지역에 독립 운동에의 의지가 강한 지사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 김진우의 집 근처에 송진우, 김성수, 여운형 등이 살고 있었으며, 이들과 늘 가까이 지냈다.
이곳에 살며 김진우는 임시정부의 밀명을 받고 자금을 대는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3.1운동이나 6.10만세 운동이 일어났던 날이 되면 일경은 김진우를 예비 검속하여 일주일이나 보름 정도씩 구속하였다가 풀어주곤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예비 검속 때가 되면 그는 미리 알고 술에 잔뜩 취해 자빠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 일본 경찰들이 하는 수 없이 들쳐 메고 갔다고 한다. 그렇게라도 일경을 골탕 먹이려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