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챌린저스> 공식 스틸컷

영화 <챌린저스> 공식 스틸컷 ⓒ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 영화 <챌린저스>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의 흔한 삼각관계 영화가 될 수도 있었다. 주제에 대한 성찰 없이 매력적인 배우 셋을 데려다 놓고는 '됐다!' 하고 마무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챌린저스>는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 거라는 예측이 개봉 전부터 우세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남자 둘에 여자 하나. 인류가 연애 이야기를 시작하고 나서부터 줄곧 재현되어 온 이 구도는 이제 물릴 만도 하지만, <챌린저스>는 여기서 소외되어 온 여성의 욕망을 전면에 내세워 훨씬 흥미로운 이야기를 엮어낸다.
 
이번에는 주인공부터 다르다

삼각관계 속 여성의 역할은 언제나 애매했다. 프랑수아 트뤼포의 1962년 영화 <쥴 앤 짐>에서도, 2003년 영화 <몽상가들>에서도, 여성은 처음에는 주체적이고 당당하게 드러난다. 그 모습이 남자 둘의 이목을 끌고, 자신을 놓고 벌어지는 두 남자의 싸움에 휘말리다가 여성은 한쪽을 선택한다. 그러나 그 선택은 대개 '잘못된 것' 내지는 '씁쓸한 것'이고, 두 남자와 여자 모두 만족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는다. 영화 초반의 아름답던 여성은 어느새 사라져 있고, 두 남자의 우정을 파괴한 '허황된 보상'으로 전락한다.
 
하지만 <챌린저스>의 주인공 '타시(젠데이아 분)'는 다르다. 영화는 타시가 자기 남편이자 테니스 선수인 '아트'와 함께 찍은 차 광고의 문구를 수정하면서 시작된다. '게임 체인저'라는 문구는 타시가 's' 하나를 그음으로써 '게임 체인저들'이 되고, 수정 사항이 반영된 광고는 작중 곳곳에 등장한다. 타시가 오래전 테니스에서 은퇴했음에도 결코 야심을 버리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연전연패를 거듭하던 스타 선수 아트는 타시의 제안으로 작은 경기에 깜짝 출연하게 된다. 쉬운 상대들을 이기며 자신감을 회복하려던 아트의 상대로 나타난 선수는 '패트릭'. 타시의 전 애인이자 아트의 둘도 없던 동반자였다. 이때부터 영화는 정신없이 코트를 가로지르는 테니스공처럼, 13년 전의 과거와 현재를 빠르게 교차시켜 관객이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13년 전, '불과 얼음'이라 불리며 우정을 과시하던 아트와 패트릭은 동시에 최고의 주니어 테니스 선수인 타시에게 눈독을 들인다. 처음엔 두 남자에게 관심이 없어 보이던 타시는, 평생을 함께해 온 두 남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점점 흥미를 느낀다. 하지만 아트와 패트릭에게 그들은 테니스가 무엇인지 모른다고 말하는데, 이에 둘은 타시에게 테니스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 질문에 대한 타시의 답은 다음과 같다.

"테니스는 관계야."
 
위의 발언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후 13년 동안 셋은 공을 주고받는 것처럼 치열하게 관계를 이어간다. 먼저 사귀기 시작한 패트릭과 타시의 관계가 안정되는가 싶으면 곧바로 둘의 의견 차이가 드러나고, 타시를 선수가 아닌 코치로 만든 부상 사건이 일어나자 아트가 패트릭의 빈자리를 꿰차 타시와 결혼한다. 하지만 아트와의 결혼 역시 안정적이지 않은데, 은퇴하고 싶은 아트와 그의 경기를 더 보고 싶은 타시의 대립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내가 무슨 예수님이라도 돼?" 자신을 조건 없이 사랑해 줄 수는 없냐는 아트의 질문에 타시는 이렇게 답한다. 그의 목표는 처음부터 끝까지 치열한 관계 속에서 피어나는 최고의 경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이 대사 직후부터 반복되는 성가대의 음악, 그리고 타시를 숭배하는 아트와 패트릭 사이에서 역사 속 구교와 신교의 대립을 읽어내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렇게 다음 날, 아트와 패트릭은 다시 한번 타시를 관객석에 두고 마지막 경기를 시작한다. <챌린저스>의 주인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훌륭한 테니스 경기' 즉 '훌륭한 관계'를 보겠다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타시였다.
 
관음의 순간마저도 여성의 것으로 만들다
 
 영화 <챌린저스> 공식 스틸컷

영화 <챌린저스> 공식 스틸컷 ⓒ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챌린저스>에서 눈에 띄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면, 바로 섹스 신의 부재와 일인칭 카메라의 사용이다. 혹자는 섹스 신의 부재를 관람등급 조정 등 현실적인 이유를 위해서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여기에는 더 깊은 의도가 있어 보인다.
 
영화가 탄생한 이래로, 아니, 가부장제가 정착한 이래로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단속의 대상'인 동시에 '관음의 대상'이었다. 성녀-창녀 이분법에서 보인 것처럼 모든 여성을 대상화(objectify)했기에 나타난 문제다. 영화도 당연히 이러한 시선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카메라가 여성을 담는 모든 순간은 남자의 시선으로 본 포르노그라피적 순간이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여성의 성적 주체성을 다루고자 했던 수많은 영화들이 실패하거나, 성공하더라도 여지없이 오해를 샀다.
 
그렇다면 어떻게 여성의 성적 해방을 이야기하면서 여성주의적 이야기를 펼쳐낼 수 있을까?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영화 <가여운 것들>과 2022년 넷플릭스 영화 <블론드>의 비교를 통해 간단하게 알아보자.

두 작품 모두 과감한 노출과 정사 장면으로 충격을 제공했지만, <가여운 것들>의 주인공 '벨라 벡스터'는 성적 경험을 자신의 성장 계기로 삼았기에 호평을 받았다. <블론드>는 마릴린 먼로의 성적 순간을 영혼 없이 전시하는 것에 그쳐 비판받았고 말이다. 성적인 예술과 포르노그라피의 구분은 여기에서 이루어진다. 그 관음적 순간은 누구의 것인가? 주인공의 것인가, 아니면 화면 밖 관객의 것인가? <가여운 것들>은 성적 순간을 주인공의 것으로 탈바꿈하는 데 성공했고, 그랬기에 소재에 대한 비판은 받았을지언정 여성주의적으로도 어느 정도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챌린저스>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과감한 생략을 통해 관음적 순간의 주인을 명확히 한 것이다. 작중의 모든 관계는 타시가 지켜보고, 타시만이 향유할 수 있다. 아트와 패트릭이 키스하는 순간에도 타시의 시선을 피할 수는 없었으며, 마지막 경기에서 사용된 일인칭 카메라 구도도 전부 타시의 마음속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관음적 영상을 보면서 자신을 그 속 인물에게 이입한 관객처럼, 타시 역시 아트와 패트릭의 관계를 모든 시점에서 볼 만큼 몰입한 것이다. 한국 수입 과정에서 사라진 <챌린저스>의 홍보 문구는 이에 대한 명백한 증거다.
 
"Her game, her rules(그녀의 게임, 그녀의 규칙)."
 
그러니 관객은 타시의 섹스 신을 볼 수 없다. 그 성적 순간은 전부 타시의 것이었으니까.
 
중요한 건, 비명!

<챌린저스>에서 단 두 번만 등장하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소재가 있다. 바로 주인공 타시의 비명이다. 타시는 그야말로 테니스가 '정점에 달했을' 때에만 환호성을 내지른다. 그것이 13년 전 자신이 뛰던 경기이든, 아니면 13년 후 자신의 두 애인이 맞서는 경기이든 상관없다. 작중 타시는 자신이 '할 줄 아는 게 라켓으로 공 치는 것밖에 없다'며 자조하기도 하지만, <챌린저스>에서 가장 테니스를 사랑한 사람은 타시임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챌린저스>의 엔딩 역시 마지막 경기에서 치열하게 싸우던 두 남자의 승패가 갈리고, 타시가 비명을 내지르는 장면이다. 물론 관객은 타시가 경기 전날 패트릭에게 져 달라고 부탁했던 사실을 알고 있고, 그가 정말로 '그럴싸하게 져 준 것일지'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타시가 그 진실된 테니스의 순간-진실된 관계의 순간에 환호성을 내질렀다는 것뿐이다.
 
이렇게 <챌린저스>는 그동안 변두리에서 대상화되어 왔던 '삼각관계 속 여성'의 지위를 회복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이 정말 극성의 여성주의자여서 타시를 이토록 입체적으로 그려낸 것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감독의 전작인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그리고 <본즈 앤 올> 등에서 알 수 있듯,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인물의 감정적·성적 해방과 그에 따른 책임을 다루는 데 집중한다. 이번에는 단지 그 해방의 대상이 타시였을 뿐이라고 볼 수 있다. 프로듀서로 직접 참여한 젠데이아의 영향력 역시 존재했을 것이고 말이다. 이처럼, 우연에 의해 탄생해 여성주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작품도 언제나 존재한다. 그러기 위한 조건은 단 하나다-여성을 대상이 아닌 동등한 인간으로 보는 것. 그뿐이다.
 
그동안 전형적으로만 다루어져 왔던 삼각관계 이야기에 질린 사람이라면, 그런데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로맨스 경기'를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번 주말에는 극장에서 <챌린저스>를 감상해 보는 것이 어떨까.
영화 챌린저스 젠데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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