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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산 봉수대에서 불길이 솟아올랐다. "왜적이 나타났다!" 봉직(봉수군)이 외쳤다. 일사분란하게 군사들은 성을 수호했고, 백성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대피하기 시작했다. 여수 돌산도에서 봉홧불이 타오르자 장흥과 강진을 거쳐 해남의 좌곡산 봉수대에 불길이 솟았다.

이어 완도의 가리포진 상왕산과 달마산 불썬봉에서 봉직이 응했다. 불길은 화산 관두산과 진도 첨찰산 봉수대로 전해졌고, 다시 영암을 거쳐 전라북도, 충청남도, 경기도 해안가 봉수대를 연결해 임금이 거처하는 한양으로 빠르게 전해졌다.

봉수는 적의 침입이 있을 때, 이를 알리는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했다. 여기에서 봉(烽)은 횃불, 수(燧)는 연기라는 뜻이다. 낮에는 불길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연기를 피워 신호를 보내고, 밤에는 횃불로 신호를 보냈기 때문에 이를 합쳐서 봉수라고 한다. 아주 드문 경우였지만, 고려 때에는 나라밖에서 사신이 왔을 때 길 안내를 위해 봉수를 피워 올리기도. 

그런데 적의 침입이 없는 평상시에도 봉수를 올렸다. '경계에 이상 없다'는 신호로 하나를 올렸던 것. 그리고 저 멀리 맞은편 봉수대에 있는 봉직이 제대로 근무하고 있는지 확인할 목적과 백성들이 안심하며 일을 하도록 한 수단이었다. 고려 때 봉수는 한 개에서 많게는 네 개까지 올렸다. 평상시에는 횃불이나 연기를 한 개 올리고, 비상시에는 상황이 급박한 정도에 따라 네 개까지 올렸던 것.   

조선시대에 와서는 하나가 더 늘어 다섯 개까지 올렸다. 평시에는 이상 없다는 의미로 1개, 적이 나타나면 2개, 적이 경계에 접근하면 3개, 경계를 침범하면 4개, 전투가 벌어지면 5개를 올렸다. 완도군처럼 해안을 끼고 설치된 봉수의 경우에는 평상시에 1개, 바다에 왜적이 나타나면 2개, 해안 가까이 접근하면 3개, 우리 수군과 해상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4개, 적병이 뭍에 상륙하면 5개를 올리게 했다.

"낮에 알리는 것은 반드시 연기로 하는데, 바람이 불면 연기가 곧바로 올라가지 못하므로 후망(候望)하기 어려우니, 이제 봉수가 있는 곳에는 모두 연통을 만들어 두게 하라." (성종실록)

성종이 명했다. 이때부터 봉수대에 연통이 설치됐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각 변방에서 한양을 연결하는 5개 노선의 봉수대 길이 있었다. 그 중 제1로 직봉과 제3~4로 직봉은 북한에 존재했고 제2로 직봉과 제5로 직봉은 남한에 존재했다. 완도 상왕봉의 봉수는 여수 돌산도에서 올라오는 봉수길에 속했다. 이것이 '제5로 직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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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까지 봉수가 도착하는 시간은 대략 12시간 정도라고 한다. 이것은 일상적으로 정해진 시간에 반복해서 올렸을 때 얘기다. 왜적이 갑자기 나타나거나 뭍으로 침입한 실제 상황에서는 시간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중종실록의 기록에는 대략 5~6일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 것으로 짐작된다.  

각 지방의 봉수대는 대략 10~20리 내외로 설치되어 임금이 계시는 한양까지 이어지는데, 비바람이 몰아쳐서 봉수를 올릴 수 없을 때는 봉수군이 다음 봉수대까지 말을 타고 달려가서 소식을 전했다고. 

봉수대 설치는 조망이 넓은 산의 정상 부근에 세웠다. 너무 높은 산은 되도록 피했다. 주로 200m 안팎의 산에 설치했지만, 주변에 야트막한 산이 없을 때는 어쩔 수 없이 높은 산에도 봉수대를 두었다. 

산이 너무 높으면 봉수군이 오가기 힘들뿐 아니라 관리도 어려웠다. 그런 곳에는 봉수군이 상시 대기할 수 있는 대기소를 만들었다. 맑은 날씨도 문제였다. 높은 산 정상부는 구름에 덮이는 경우가 많았다. 

구름에 갇히면 봉수를 올려도 헷갈리는 경우가 자주 발생했다. 그래서 높은 산에는 봉수대를 설치를 피하려고 했던 것. 횃불과 달리 연기는 약한 바람에도 흩어졌다. 

연기가 흩어지면 2개를 피워 올린 것인지, 3개를 올린 것인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연기가 곧게 올라갈 수 있도록 여러 방법을 시도한 끝에 묘책을 마련했다. 그것은 주변에 널려있는 마른 말똥과 소똥을 왕겨와 솔잎 등에 섞어서 연기를 피웠던 것이다. 연기가 흩어지지 않게 하는 데는 마소의 마른 똥을 사용한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봉수를 설치해 비상시를 활용한 제도는 당시 상황으로는 가장 신속한 연락 체계였다. 

그렇지만 날씨에 따라서 연락이 끊기는 일이 잦았다. 거기에 더해 봉수군의 근무태만도 문제였다. 그래서 봉직을 맡은 봉수군에게 문제가 생겨서 봉수를 올리지 않으면 봉수군과 해당 고을의 수령까지 처벌받는 원칙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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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때의 일이다. 강화부 유수 이의필이 장계하기를 "이달 7일 본부의 남산 봉수대에서 봉화를 올리지 않았는데 조사해 보니 봉직이 술에 취하여 실수했습니다. 제대로 단속하고 경계하지 못한 잘못이니 황공하여 처벌을 기다립니다"라고 하자 이에 비변사가 해당 유수를 파직하도록 계청했고 그대로 따랐다며 정조실록에 기록했다.

강화 남산의 봉수군이 낮술에 취해 봉수를 올리지 못했고 그 결과 강화유수가 파직되는 일이 발생했는데 정조는 그 책임을 엄히 물었다. 요즘 같아도 전쟁에서 패한 병사는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병사는 용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시기에 따라 처벌 규정이 조금씩 달라졌다. 1532년 당시의 규정에는 적이 출현했을 때 봉수를 올리지 않으면 봉수군은 곤장 80대, 수령은 70대를 맞았다. 적이 경계에 이르렀는데 봉수를 올리지 않으면 봉수군은 장 100대, 수령은 장 100대에 더해서 파직을 당했다. 적과 접전이 벌어졌는데도 올리지 않으면, 봉수군과 수령 모두 참형에 처했다. 

한편, 국가유산청 지표조사에 의하면 완도 지역의 봉수대는 여서도, 청산도, 소안도, 보길도, 약산도, 고금도, 완도읍 상왕산 등지에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글쓴이는 정지승 문화활동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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